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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Oct 27. 2024

검투사의 칼

<8월에 만나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2024

[8월에 만나요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검투사의 칼


그럴 때가 있다. 애써 꾹꾹 눌러 보낸 마음이 전혀 가닿지 않는 때. 말풍선 옆으로 작은 1은 사라졌지만, 내 마음은 영영 가닿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때가. 글씨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는 모양이 완전한 무위로 돌아가버리는 때가. 획이 해독되지 못한 채 공기 중을 뚜뚜- 정처 없이 가르는 때가. 종종 인간은 그런 애달픈 상황을 겪어야 하는 모양이다. 속도 모르고 창밖에 섬진이 흐른다. 저도 저의 배 밑에 무엇을 깔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묵묵히 자갈 위를, 부드러운 흙 위를, 하염없이 걷는다. 강 가운데 깊은 곳에서는 돌을 지붕 삼아 눈 부신 햇살을 피해 새우잠 자는 물고기들이 자란다. 강가에는 수풀이 자라 강에 흐르는 것이 강 밖을, 강 밖에 사는 것들이 강 안쪽을, 서로 해하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쓰며 세찬 물줄기를 견디어 낸다.


강은 묵묵해서 오랜 세월 바위를 부수고, 자갈을 부수어, 곱디고운 흙을 슬며시 강가로 떠밀어준다. 그 비옥한 땅 위로 인간은 씨앗을 뿌리고 묘목은 강의 젖줄기를 입에 물고 쑥쑥 자란다. 그러니 강이 우리를 낳았다. 태고에 이 땅의 주인이 자연이었고, 그리하여 모두가 자연을 어머니라고 불렀을 때부터 인간은 강을 닮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시간이 지나 인간이 어머니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게 되면서 조금씩 불행이 싹을 틔웠다. 강은 말없이 우직하게 흐르고 자비롭지만, 천년을 버틴 바위에는 미끄러운 이끼가 잔뜩 끼어있고, 푸르디 푸르른 용소 한가운데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소용돌이가 친다. 누구를 닮았길래, 한 길 사람 속이 이렇게 복잡할 수 있나. 했더니만, 영락없이 강을 닮았다. 납작한 조약돌을 들어 강 위에 뜀박질을 시켜도 강은 아무 말이 없다. 어두컴컴한 속을 감춘 채 뙤약볕을 물살로 튕겨내며, 달빛만 내리는 깜깜한 밤에도, 그저 흐른다.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사조 자체와 그것을 기조로 쓰인 작품들을 사랑한다. 하루키에 따르면 인간의 삶을 이루는 만물은 메타포다. 인간은 같은 현상을 겪고, 같은 대상을 관찰하고, 같은 시간을 살아내면서도, 끝끝내 서로 각자 다른 꼭짓점에 서 있다. 그런 측면에서, 같은 시간대에서 같은 환경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주의 만물이 메타포 자체거나, 어떤 의미의 표식이라면, 우리 삶은 만물을 해석하는 일로 이루어져 있을 테니까. 마술(마귀 마 魔, 재주 술 術)과 사실(일 사 事, 열매 실 實)이라는 병치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단어들이 기가 막힌 한 쌍을 이루는 것도 우주 만물이 메타포인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물론 메타포의 해석은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인간의 실존에 의존하고, 인간의 실존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본질적 탐구로 완성되지만, 이론 밖에 발붙이고 사는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순수하게 자신과의 대화만으로는 완전히 자기를 이해하기 어렵다.


비교(견줄 비 比, 비교할 교 較)는 자기 이해라는 철저하게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영역의 사유 과정을, 타인과 자신의 공통점, 차이점의 확인을 통해 구체화, 실체화하는 데에 탁월한 수단으로 역할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따라서 숙명적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비추어 보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타인과의 관계가 비자발성, 우연성에 기대어 마법처럼 맺어진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마술적’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삶, 인간관계의 역학을 굉장히 사실적으로 설명한다. 요컨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리얼리즘을 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일응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역설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여 역설적온각(거스를 역 逆, 말씀 설 說, 과녁 적 的, 따뜻할 온 溫, 깨달을 각 覺) 효과를 노린 것처럼 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표현 내용과 방식이 일치하는 유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마술적 사실주의의 선두주자가 20세기의 라틴 문학을 이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다. <백년의 고독>을 위시한 마르케스의 작품들은 인간이 갖는 존재론적 숙명에 대하여 불편할 정도로 솔직하고 거칠게, 그리고 부계사회에 초점을 맞춰 가부장적으로 다루어왔다. <백년의 고독>은 근친상간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로, 한 가문이 외로움이라는 선천적 운명에 맞서면서도, 종국에는 숙명적 한계를 향해 서서히, 비극적으로 몰락해 가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이다. 물론 거시적으로 부엔디아 가(家)는 탄생과 동시에 멸문을 향해 추락하지만, 미시적으로는 작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데, 전체적으로 하강하는 곡선 안에서 잠시나마 아주 살짝이라도 상승곡선을 그리며 흥성(일어날 흥 興, 성할 성 盛)하는 순간은 대부분 이 가문의 강인한 여성, ‘우르술라’들 덕분이다. 안타깝게도 마르케스는 <백년의 고독>을 포함한 다른 작품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기용하거나, <백년의 고독> 이후에 발표한 작품들에서 여성 캐릭터를 비극적인 상황을 스스로의 힘으로 타개하는 주체적인 인물로 묘사한 바 없다. 그리고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자 붐 소설의 시대를 이끈 전설적인 거장인 마르케스가 타계한 지 어느덧 10년이 지나고, 2024년 그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쓴 유고작 <8월에 만나요>가, 마르케스가 생전에 신뢰했던 편집자의 노력과 마르케스의 두 아들의 지원에 힘입어 세상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본작에서 우리는 실로 오랜만에, 우르술라를 만나게 된다.


본작은 아나 막달레나 바흐가 매년 8월 16일, 홀로 자신의 어머니가 묻혀 있는 섬으로 떠나, 어머니의 무덤에 글라디올러스 한 다발을 두고 오는 나름의 정례 의식을 치르면서 생긴 일을 담고 있다. 아나는 남편을 무척 사랑하고, 어린 딸 역시 깊이 사랑하는 만큼 진심으로 걱정한다. 그러나 남편은 집안에서 다정한 만큼 집 밖에서도 다정한 탓에 끊임없이 바람을 피워왔고, 어린 딸은 제멋대로 굴면서 아나를 속상하게 한다. 한편, 아나는 여느 해처럼 찌는 듯한 더위를 뚫고 여객선과 택시를 거쳐 글라디올러스를 헌화한다. 그리고 그날 밤 호텔 바에서 처음 보는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평생을 좋은 아내이자 엄마, 그리고 좋은 학교 선생님으로, 자기 자신보다 자기 자신이 돌봐야 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살아왔던 그녀는, 슬프게도 불륜이라는 도덕적으로 뒤틀린 경험 안에서 생전 처음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 첫 일탈 이후로도, 아나는 매년 8월 16일이 되면 어김없이 섬에 방문하고, 인생에서 깔끔하게 도려내고 싶은 하룻밤을, 또 영원히 기억할만한 하룻밤을 보내보기도 한다. 아나는 첫 일탈 6년 후의 8월 16일, 어머니의 무덤가에 놓인 꽃 무더기가 썩어서 땅이 들려 있는 것을 보고 묘지 관리자에게 그 경위를 확인했다가, 아버지가 아닌 남성이 글라디올러스로 어머니 묘비 주변을 한가득 채워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순간 아나는 어머니가 왜 연고도 없는 섬에 사업차 자주 방문했고, 끝내 그 섬에 묻히기를 원했는지 이해한다. 아나는 공동묘지 수용 한계보다 많은 인원을 수용해서 관리자가 관을 수직으로 매장해 놓은 환경에 더 이상 어머니를 모실 수 없어 이장(옮길 이 移, 장사 장 葬)을 결정하고, 파묘 과정에서 정작 어머니가 죽음에 함께한 삶의 흔적은 결혼식 때 썼던 면사포와 결혼반지였다는 것을 확인한다. 아나는 그 인지에서 어머니의 양가적 감정, 모순적인 면모를 발견하고, 또한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아나는 어머니의 유골을 수습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놀라는 남편에게 어머니야말로 모든 것을 이해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마르케스가 말년에 자신의 물리적 한계에 대항하면서 써 내려간 본작은, 아쉽게도 분명 그의 대표작들만큼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마르케스표 마술적 리얼리즘의 흔적도 옅게 느껴진다. 연대별로 수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촘촘하게 관계성을 부여했던 <백년의 고독>, <족장의 가을>과 같은 치밀함도 부족하다. 그러나 본작은 치매와 노환으로 고통받았던 마르케스가, 죽음이라는 숙명적인 한계 앞에서 끝까지 해낸, 작가로서의 자신의 가치와 우리 세계 안에서 자신이 설정한 자신의 의미에 대한 증명, 그리고 인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실존 기록 그 자체다. 또한 본작은 그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무엇인가를 함축한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 자체로 존재하는 것.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신이 원하는 의미로 존재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내는 것. 나아가 자기 자신마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것. 나는 우리 삶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긴 포물선이라고 생각하고는 한다. 마술적인 작용 때문에, 우연하고 비자발적으로 포물선이 서로 만나는 찰나가, 이 길게 꼬리 무는 포물선들의 아주 작은 교집합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지극히 과학적인 작용 때문에 두 포물선은 그 작은 잔상만을 엷게 남긴 채, 그려 마땅한 남은 궤적을 그리며 자신만의 궤도 위로 움직인다.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고,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지만, 아주 짧은 찰나, 작은 점이라도. 포물선이 만난 순간은 사랑으로 남아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킨다. 사랑만이 필멸의 존재의 지극히 일부라도, 이 땅 위에서 불멸하게 한다. 마르케스는 평생 동안 작가로 자신을 피워 올리며, 먼 땅에서 그의 글을 들여다보는 독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결국에는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이 메시지는 글라디올러스의 이미지로 독자들의 눈앞에 현화한다. 글라디올러스는 라틴어 Gladius(뾰족한 검)에서 유래한다. 이 꽃은 이름에 걸맞게도 존재감 있는 뾰족한 모습과 금방이라도 글래디에이터의 선연한 피가 묻어 나올 것 같은 화려한 색깔로 피어나지만, 이상하게도 향기가 전혀 나지 않는다. 아나가 매년 어머니에게 글라디올러스를 헌화하는 것은, 두 모녀가 타인과의 관계로 정의되는 삶을 살았다는 측면에서, 이 슬픈 승계(이을 승 承, 이을 계 繼) 구도를 기념하는 일이 된다. 글라디올러스는 아나 모녀가 수려한 외모를 갖추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등 겉으로 보기에 평온한 삶을 살았지만, 삶의 대부분을 자신이 누구고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지 전혀 모른 채로 그저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야 했다는 점을 상기하게 한다. 글라디올러스는 가까이 가서 보면 특유의 향기가 나지 않는 두 모녀를 상징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녀가 그 섬에서만큼은 가장 자신다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아나의 헌화행위는 어머니에 대한 추모이자 위로, 또한 과거의 자신에 대한 인정과 위로와 같다. 모녀는 불륜이라는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통해서 아직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독립된 개체로서 자신의 존재감이나 정신적 부피감을 구체적으로 인지함에 따라, 자신을 점점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불륜이라는 추동 장치가 없이도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선이었던 악순환의 고리는, 어머니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사랑의 증표를 품고 생을 마감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아나가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공표함으로써 완전히 끊어진다. 더 이상 8월에 만나지 않음으로 해서 사랑은 더 강한 모습으로 아나 안에 갈무리된다. 생의 마지막까지도 마르케스의 마음은 사랑으로 향하고 있었다.


눈앞에 마르케스가 놓고 간 글라디올러스를 바라보며 과거를 생각한다. 애쓰던 때가 있었다. 인정받으려고, 사랑받으려고, 내 마음을 어떻게든 활자에 태워 누군가의 마음에 안착시키려고. 그래서 이해받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 모든 과정이 무용하다고 느낄 때도 많았다. 나는 여전히 사랑해 마지않는 C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말은 가닿지 못하고 바람에 나부꼈고, 마음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내 노력에 그럴 필요 없다고 회신했다. 종종 C의 결혼식에 갔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차가운 답장 앞에서도, 여전히 사랑이었다고 말했어야 했다. 관계에 수동적으로, 상대방이 정한 대로 임했던 순간들을 속으로 주워 삼긴다. 수많은 얼굴들이 눈앞을 지나간다. 동시에 나의 마음이 평화롭기 위하여, 친구로서 그 옆에 서면 나도 모르게 나를 사랑하지 못했던 순간에서 자유롭기 위하여, 내가 나이기 위하여 내린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도 한다-물론 그들과 친구로 지내면서 내 마음이 지옥이었던 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다-. 보내지 못하고 메모장에 쌓여 있는 메시지를 지운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마음이 완전한 무위 사이에 덮여 어느 쓸쓸한 태고의 강기슭에 묻혀도 어쩌면 괜찮을 것도 같다고. 태고의 시간에 에워 싸인채로 강바닥에 가라앉아, 다른 시간들 사이로 흐르는 해독되지 못한 마음들과 묵묵히 흐르는 세월 속에서, 차츰 부수어져 사라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래도 강은 흐르고, 우리는 오늘을 살아낼 것이며, 결국 사랑으로 괜찮아질 것이다. 종종 인간과 인간의 마음은 그런 애달픈 순간을 겪어야 하는 모양이다. 어느 순간엔 포물선들의 처연했던 맞부딪음을, 그 순간의 나를. 가닿지 못하고 강기슭에 쌓인 마음들을. 글라디올러스로 위로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검투사의 칼을 두고 돌아서는 나의 뒷모습에 향기가 있기를. 더 이상 글라디올러스는 향기 없는 꽃이 아니기를. 내 삶을 위해 내가 뽑아 들었던 칼은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아,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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