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힘은 실로 엄청나다. 생각보다 많은 관계들이 인연이라는 이름의 그늘 아래 있다는 사실이 만드는 응집력으로 그 생명력을 연장한다. 몇 주 전 일주일 동안 승진자교육을 받으러 갔다. 같은 시기에 입사했다는 인연 덕분에 같은 공채 동기들과 매일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초임지에서 가깝게 지냈던 K와 입사동기이자 동갑이라는 인연이 겹쳐 친밀도가 남다른 P와 특히 많은 시간을 보냈다. K와 P는 서로 잘 모르는 사이지만, 동기라는 인연의 이름 덕분에, 그리고 내가 두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로 기능한 덕분에, 짧은 시간 동안 무척 돈독해졌다. 묘했다. 1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내면서 단 한 번도 소통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로 인연의 힘을 연장하고, 강화시키는 장면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인연은 비자발성과 우연성에 그 발생을 의존하지만, 인간의 의지로 연속성 내지는 영속성을 얻는다.
임경선의 <다하지 못한 말>은 인연의 곡진한 뒷모습을 그린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를 떠올리게 한다. 임경선의 <다 하지 못한 말>에서 화자는 헤어진 연인과의 사랑을, 사랑의 순간에, 사랑이 바래져 가는 순간에, 사랑이 한 줌으로 바스러져 흩날리던 순간에, 그녀가 그에게 건네지 못하고 삼켜버렸던 말들을 중심으로 회상한다. 반면 <패스트 라이브즈>는 노라와 해성의 이야기를 다 하지 못했던 말들이 ‘적정한 형태를 찾아서’ 혹은 다 하지 못했으나 끝내 전해져서는 안 되는 말들이 다른 말이나 행동으로 대체되어 전해지는 현장을 마치 생중계하는 것처럼 관객에게 전달한다. 본작의 화자는 매일 반복되는 단순한 루틴에 지쳐 있는 평범한 공무원이다. 그녀는 점심시간이면 광화문 주변으로 쏟아져 나오는 천편일률적인 인간 군상 속에서 자신도 그 일부라는 자각에 사로잡혀 남몰래 괴로워한다. 그런 그녀에게 지극히 우연하게 비자발적인 인연이 찾아든다. 공원에 회사원증을 목에 걸고, 저마다 커피를 손에 쥐고 휴식을 가장한 시간 때우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틈. 벌레가 날아들자 일군의 여성들이 소리를 지르고, 한 남자가 나타나 그 벌레의 이름은 각시 메뚜기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주며, 각시 메뚜기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준다. 이 장면은 그녀에게 일상의 밖에서 튀어나온 비범인의 출현으로 각인된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각시 메뚜기에게서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름을 찾아주고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준 사람. 당연한 수순처럼 그녀는 일면식도 모르는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인연은 비자발적이고 우연한 끈이다. 인생이 허공에 긋는 무상한 포물선이라면, 다른 포물선과 우연하게 마주치는 순간. 두 우주가 비자발적으로 만나는 순간이야말로 인연의 발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정장을 갖춰 입은 수많은 부품들 속에서 홀로 살아 빛나는 그를 찾는다. 자주 찾는 카페에서 그와 우연히 조우한 그녀는, 인연의 시작이 대개 그렇듯이 그와 우연한 기회에 합석하고, 폭풍처럼 둘은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애처롭게도 사랑은 천칭 위에서 균형으로 발견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연애 초반 둘은 매일 점심 그의 오피스텔에서 몸을 섞는다. 피아니스트인 그는 예술업계의 특성상, 자신의 커리어를 독보적인 것으로 끌어올리고 업계 내에서 인정받음과 동시에 안정적인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그녀와의 인연보다 예술의 완결성을 도모하는 데에 점점 더 집중한다. 활자 위에서 Jamie XX 가 <Treat Each Other Right>에서 노래한 “All we got to do is treat each other right”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 연출된다. 그녀는 점점 멀어지는 그를 붙잡기 위해, 사랑의 실존을 이룩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 할 수 있는 모든 최선. 그가 일하게 된 대학을 찾아가거나, 답장 없는 그에게 메일을 보내거나, 그의 오피스텔에 말없이 찾아가 문 앞에 서있기. 인연은 인간의 의지로 연속성을 갖기도 하지만, 그 의지와 무색한 결말을 맞기도 한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다면 비극적인 결말에도 의미가 깃들고, 사랑이 미결에 부쳐지더라도 이는 오롯이 인간의 의지가 개입된 결과다.
종종 지인의 이별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연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마주 앉아 이별을 고하고, 받아들이고, 갈무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다. 나도 모든 인연을 그렇게 보내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예고도 없이 찾아든 커다란 행운을 잃는 일에 행운을 함께 겪었던 두 포물선이 마주 앉아 이별의 의식을 치르는 것이, 행운의 순간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는 한다. 액정 앞에 앉아, 희미한 전파를 타고, 안녕. 하고 짧은 인사를 전하는 것만으로는 긴 이별에 수반되는 가혹함이 배가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본작의 당신은 그녀에게, 내년 봄에 덕수궁 수양벚꽃나무가 만개하면 사진으로 그 순간을 갈무리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다하지 못한 말을 가슴에 묻은 상태로 1년. 그녀는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똑같은 루틴을 즐기는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커피를 손에 쥐고 산책하며 시간 때우기를 하던 중에, 수양벚꽃나무가 만개한 풍경과 마주한다. 그녀는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벚꽃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고 자신의 차례가 되자, 괜찮다고 사양한다. 그러다 아, 그녀는 그에게 다하지 못한 말을 하기 위해, 이별의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 오직 당신.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을 하기 위해, 제대로 작별하기 위해서, 카메라 앞에 서겠다고 용기 내어 이야기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파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해.
“인생의 모든 것은 결국 뭔가를 놓아주는 행위가 되는데, 언제나 가슴 아픈 것은 작별 인사를 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다는 거예요. (I suppose in the end, the whole of life becomes an act of letting go, but what always hurts the most is not taking a moment to say goodbye.)”
<다 하지 못한 말> p. 207
세상에 어떤 작별에 좋은(good) 안녕(bye)이 있을까. 그래서 더더욱, 좋을 수 없는 작별 앞에서 우리는 안녕을 제대로 이야기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더라도. 하고 싶은 말에 섞여 있기 마련인,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대신할 말이나, 표정이나, 눈물을 서로에게 전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가. 인연은 가볍게 찾아오고, 녹진하게 머물다가, 여운을 남기며 떠난다. 너무 가벼워서 아쉬웠다면, 너무 녹진해서 힘겹다면, 너무 여운이 길어서 버겁다면. 나의 의지로 생명력을 연장했던 그 인연을, 나의 최선으로 놓아주고 갈무리함이 마땅하지 않나.
그리고 그렇게 사진을 찍는 순간, 그녀는 그와 제대로 된 작별을 함과 동시에, 자신을 똑바로 바라본다. 루틴은 삶을 지겹게 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규칙성에서 오는 안정감과 매일을 살아내는 치열한 일을 해내고 있다는 감각은 주로 루틴에 기인한다. 지속성은 특정 행위가 수단으로 기능할 때보다 그것 자체가 필요이자 목적일 때, 더 두터운 생명력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실존과도 깊은 연관을 맺는다면, 행위의 주체는 일상에서 육체적 피로를 얻을지언정, 필연적으로 정신적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다. 먹고 산다는 질긴 일은 종종 인간을 초라하게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삶을 살아낸다는 사실이 나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울지언정 그것으로 이루어진 삶의 가치의 가늠자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정의할 수 있다. 인간 실존은 내가 누구인가 스스로 묻고 스스로에게 대답하는 치열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직업, 나이, 커피 한 잔의 백일몽 속에 있는 획일적인 군상 속에서 스스로를 부품이라고 느끼는 한 사람이라는 사실 같은 것이 결정하지 않는다.
K는 결혼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나는 K가 다른 연애를 마치고, 현재의 남편과 만나 결혼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K, P와 함께 떡볶이를 먹으면서 맥주를 마시다가 대화의 주제가 우연하게 연애와 결혼에 머물렀다. K가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점심시간에 식당가로 걸어가다가 복잡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예의 다른 연애의 상대방을 우연히 마주쳤다고 한다. K와 그가 헤어졌을 때, 짐작건대 그에게는 K에게 다 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었다. 둘은 담담히 서로를 지나쳤다. 그리고 다음날, K가 또다시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 창문 밖으로 지나는 그를 다시 마주친다. 그도 아마 K를 발견했을 것이다. 본작의 그녀가 그를 발견했던 순간처럼. 인연은 제대로 작별을 고하는 행위로 갈무리되지 않는 이상, 과거에 개입된 의지로도 영속하기 마련인 것일지도 모른다. K는 그 두 번째 조우에 대하여, 그와 커피 한잔을 두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고 회고했다. 어쩌면 K와 그 사이에 다 하지 못한 말들이 우묵히 쌓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K의 친구는 K의 둘째 아들과 헤어진 그의 아들의 이름이 같다고 알려줬다고 한다.
K와 그 사이에 해묵은 감정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난데없이 떡볶이 앞에서. 나와 P는 옛 연인과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싶었다는 K의 마음을 완벽히 이해했다. 본작의 그녀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더 이상 누군가가 누군가를 질투하거나, 천칭 위의 균형이 맞지 않아 속상해하거나, 미워하지 않더라도. 다 하지 못한 말을 하거나, 듣는 것. 제대로 작별하는 것은 인연에 필요한 일이다. 신기하다고 축약할 수만은 없는 힘에 대하여. 그 힘 아래에 모인 사람들이 생각했다. 내게도 인연의 흐름을 우연에 맡긴 채, 인연의 뒷모습을 무력하게 모른척하던 순간들이 있었다. 다 하지 못한 말이 있다. 떠난 인연들을 생각한다. 그 뒷모습이 내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 인연이라는 것은 이토록 가볍게, 우연하게 찾아온다. 녹진하게 머문다. 그리고 긴 여운으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