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녘 연필소리 Oct 27. 2024

메타포로 실존하다.

<샤이닝>, 욘 포세, 2024

[샤이닝 - 욘 포세] 메타포로 실존하다.
 
세상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 하루키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처럼, 우리의 우주를 만드는 만물은 어쩌면 메타포다. 발리식 힌두교가 모든 존재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것도 하루키의 믿음과 비슷한 관점을 공유한다. 때문에 우리 세계는 한 가지 대상도 달리 해석한다는 현상에 말미암아, 다양한 방식으로 변칙을 겪으며 전진한다. 모든 것이 메타포가 아니라면, 모든 존재에 저마다의 의미가 깃들어 있지 않다면, 우주는 천편일률적인 삶들을 겹겹이 쌓아 올린 두꺼운 퇴적물에 불과할 것이다. 다른 색깔도 무늬도 섞이지 않은, 존재 의미 없이 커다란 덩어리.

 

동시에 세상 위의 모든 존재에 의미가 부여될 필요는 없다. 의미를 둘러싸고 있는 상관관계는 늘 상대적이기 마련이다. ‘무엇’의 의미와 그것이 작용하는 무게감은 저마다에게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의미나 무게감은 존재 사이의 상호작용 유무나 그 정도와 무관하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는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존재의미가 있지만, 반대로 활발한 교류에도 불구하고 어떤 존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의미일 수도 있다. 심지어 인간은 종종 어떤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고 부를만한 면면과 마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저마다 달리 해석할 수는 있어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삶의 요소도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인간의 삶에 본질적인 존재적 한계로 작용하며, 그리하여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결국 허공에 흩어질 무용한 행위를 끝끝내 실행에 옮김으로 인하여 자신의 의미를 연구하게 하는 것. 죽음. 인간은 죽음 덕분에, 결국 자신이 한계에 부닥쳐 소실될 것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한 최선을 선택하고, 살아낸다. 욘 포세는 <샤이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고 지루함에 사정없이 흔들려 왔던 누군가도, 죽음 앞에서 압축적으로 자신의 의미를 겪어내고야 마는 장면을 그려낸다. 자발적인 사고(일 사 事, 연고 고 故)로 눈 쌓인 숲에 홀로 존재하게 된 ‘나’는 인가를 찾거나 큰 도로변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차 안에 앉아 있기로 한다. 그러다 문득 차 밖으로 나와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 이는 그가 자기 자신의 지난 생활에 대하여 지루했다고 진술했던 것을 극복하려는 도전이기보다, 그 지난한 삶의 결과에 가깝다. 그는 회백색이었던 자신의 지난날을 차에 두고 내려, 차라리 창백한 백색 속으로 맨몸으로. 제 발로 걸어간다.

 

어두운 숲 속에서 그는, 하얀색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초월적 존재를 목격한다. 뒤이어 이 장면이 현실이라면 숲에서 만날 수 없는 것들을 연이어 마주친다. 끊임없이 ‘나’를 찾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뒤쫓아 다니는 아버지, 이런 숲 속에 있을법하지 않은 크기와 모양새의 커다란 바위. 욘 포세 특유의 연극적 연출과 의식의 흐름을 정신없이 옮긴 듯한 문장이, 삶에 대한 어떤 고민 없이 살아왔고 따라서 죽음이라는 주제 앞에서도 어떤 주체적 사고(생각할 사 思, 생각할 고 考)도 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그의 상태를 독자가 심적으로 또한 물리적으로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스스로 지루함에 고립시켰던 자신의 삶이 상황의 흐름에 따르도록 허락하였듯, 죽음의 사고방식에 자신을 내맡기고야 만다. 스테디캠처럼 흔들림 없는 서술 속에서 그의 마지막 순간이 정신없이 흔들림에 따라 비극은 점차 극대화한다. 그의 전작 <아침 그리고 저녁>의 극단적인 삶의 비극보다 상대적으로 고요한 죽음의 비극이 더 한탄스러운 것은 이런 격차에서 기인한다.

 

자신의 지루했던 삶에 탄식하던 그는, 정작 죽음의 순간에 접어들자 침묵을 갈구한다. 접촉을 유예했던 생(生)의 목소리들이 함박눈처럼 그에게 쏟아지는 가운데, 그는 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음소거(소리 음 音, 사라질 소 消, 갈 거 去)의 상태를 간절히 원한다. 그는 침묵 속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자 모든 의미가 소실(사라질 소 消, 잃을 실 失)하였음을, 그러나 사실은 모든 의미가 자기 자신을 소실점 삼아 하나로 만나게 되었음을, 그리하여 신의 목소리는 자기 자신 안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짐을 목격하면서, 동시에 그 의미가 자신으로 축약됨을 온몸으로 겪는다. 그가 그토록 듣고자 했던 신의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였고, 지루하다고 치부했던 자신의 생에 깃든 침묵의 순간에 미처 듣지 못하거나 들여다보기를 애써 피했던 자신의 본질적 자아의 얼굴이었다. 그가 신을 향해 던졌던 물음표로 귀결하지 않는 모든 물음들은 온전한 생의 순간에 그가 그 스스로에게 던져야 했던 물음들이었다.

 

욘 포세의 작품을 통해 감히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운 거대한 비극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다 보면, 늘 삶의 내핵에서 빛나고 있지만 어둠과 침묵 속에서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24살 아직 죽음의 의미를 가늠하기 어린 나이에 전신마취 후 귀 뒤쪽을 절개해야 하는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딸을 잃은 아픔을 감당해야 할 부모님을 위해 긴 편지를 쓰고 주변을 정리했던 그날들을 겪은 후로 내 인생은 크게 달라졌다. 코앞에 와있을지 모르는 순백색의 순간을 대비해서 남은 오늘들을 내가 정한 온전한 나로 살아내기 위해서, 나는 누구이고 어떤 의미인지 자주 묻고 대답했다. 샤이닝을 보면서 숲 속의 그가 신의 이름을 빌어 자신에게 물었듯이. 삶의 의지는 그렇게 단단해진다. 작품의 강력한 이야기와 물리적인 퍼포먼스에 압도당하면서도 죽음 앞에서 단단해진 내 삶의 의미를 생각했다. 이것이 오만은 아니라고 감히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의미들이 범람하고, 해석하지 못한 메타포들이 발아래 가득한, 눈 내린 숲 한가운데에 혈혈단신 서 있다. 그러나 그저 하루만이 남았다고 하더라도, 귀 기울일 침묵의 시간이 남아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날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물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선 날이후로,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우주의 만물은 메타포다. 이야기다. 그리고 이야기의 의미는 이야기의 주인만이, 삶의 의미는 삶의 주인만이 결정하고 부여할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을 실존(열매 실 實, 있을 존 存)하게 한다. 실존을 위해 무용한 몸짓을 기꺼이 흩날린 순간들 덕분에, 샤이닝을 만나는 그날, 침묵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 속에 생생했던 침묵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의미들이다. 의미의 적체임과 동시에 무의미다. 순배색의 공허이자, 눈부시게 빛나는 의미의 소실점(消失點)이다.

이전 08화 인연, 가볍고도 녹진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