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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Oct 27. 2024

사랑의 인터내셔널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2024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 김기태] 사랑의 인터내셔널

인간은 정치(정사, 칠 정 政, 다스릴 치 治)적 동물이다. 모든 인간은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자신의 의미를 규정하고 살아내야 하지만, 동시에 혼자서는 인간다운 생을 살아낼 수 없다. 인간은 혼자만의 힘으로 굶주림을 면하고 나아가 다양한 영양소를 고루 섭취할 수 있을만한 규모의 농업, 어업 등 1차 산업을 운영할 수 없다. 특히 추위, 더위, 가뭄, 홍수 등 극복하지 않으면 생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자연환경의 위협을 해결할 수 있는 2차 산업, 가령 광업, 제조업, 전력, 가스, 수도업 등의 경우, 분업과 현업을 요한다는 측면에서 다수의 인간이 노동력을 투입할 것을 필요로 한다. 요컨대 인간 생존에 유의미한 규모의 모든 산업은 사회라는 체계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은 물리적으로 생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생산활동을 산업화했고, 이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사회를 구축했다. 사회는 역으로 인간의 내밀한 내적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인간들이 저마다 다른 목적으로, 의사소통을 기반으로 관계를 구축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메타인지를 구축하며, 타인 간의 관계와 자신의 관계를 비교하며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형태를 연구한다. 그리고 이 활동이 그가 소속한 공동체 즉 사회 안에서, 다른 구성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회와 그 구성원은 유기적으로 영향력을 주고받는 복잡다단한 구조를 구성하며 서로의 성립과 존치에 있어 중요한 요소들이 되었다. 인간은 사회(모일 사 社, 모일, 모을 회 會)적 동물이다.

 

정치는 사전적으로, 국가라는 거대한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권력 이동과 관계된 활동과 국민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질서를 확립하는 행위를 총체적으로 일컫는다. 그러나 규모를 막론하고 지배구조가 발견되는 어떤 사회에서라도, 통치(다스릴 통 統, 다스릴 치 治)와 그 반작용(돌이킬 반 反, 지을 작 作, 쓸 용 用)이 존재한다면, 그 작용의 합을 통틀어 정치라고 부를 수 있다. 수년 전부터 콘텐츠의 가치를 판단하는데 기준처럼 사용해 온 PC (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역시, 본래적 의미의 협의의 정치뿐만 아니라 사실적 의미의 정치, 광의의 정치까지 그 범위를 넓혀 정의(정할 정 定, 옳을 의 義)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은 특정 텍스트를 공격하거나, 논술의 영역에서 기술적으로 예상되는 반박을 미리 잠재우기 위해 오남용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을 이용하여 논리적으로 상대를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자본주의 내에서의 권력구조에 기인한다. 요컨대 PC는, 소비자의 시간과 자본은 제한되어 있는 반면, 과거부터 쌓아온 것을 포함하면 콘텐츠가 범람하다시피 하는 사회에서, 지극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오남용 되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협의 과정 없이는 상생이 불가능한 다면적인 사회에서 절대적인 올바름이 존재할 수나 있는 개념인가.

 

물론 어떤 존재를 폭력으로 대하는, 예컨대 물리적 혹은 정신적 폭행, 차별, 분류, 소외(소통할 소 疏, 바깥 외 外), 무례 등의 행위는 절대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에서 벗어나는 범주의 것들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 외의 정치, 성, 문화, 외교 등 갈등이 발생할 수 있으나 대립의 축이 되는 여러 견해, 가치관, 취향, 성향 중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으로 가치판단하기 어려운 영역에서는 절대적인 정치적 올바름이 존재하기 어렵다. 김기태의 단편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현대 사회가 매몰되어 있는 정치적 올바름의 허상(빌, 헛될 허 虛, 모양 상 像)성을 지적하고 있다. <세상 모든 바다>에 등장하는 아이돌 세모바, <로나, 우리의 별>의 로나는, 예쁘고 예술적으로 뛰어난 동시에 정치적으로 올바르기까지 하다. 작품은 이 완벽한 스타들을, 정치적 올바름마저 소비하고 있으며 이 소비에 따라 그들의 언행 너머의 내심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평가하는 냉혹한 현대사회에 노출시킨다. 그리고 이 노출을 통해 현대사회가 신봉하는 정치적 올바름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얼마나 취약하게 흔들릴 수 있는 기준인지를 보여준다. 세모바는 자연, 정치, 문화, 외교 등 세계의 내핵을 이루는 환경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룹이고, 그들을 추종하는 팬들 역시 그들의 흐름에 면밀하게 동행하지만, 그들의 PC를 저마다의 기준으로 해석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표출한 결과 거대한 비극을 초래한다. 로나는 대국민 투표를 통해 우승자를 가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으며 스타의 반열에 등극하고, 커리어의 시작부터 무엇 하나 부족하다 할만한 부분이 없는 이른바 육각형 연예인이 된다. 물론 그녀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기까지 하고, 그 가치관도 대중의 응원을 받지만, 그녀의 가치관은 환경에 따라 조금씩 외형을 달리할 뿐 중심은 변하지 않는데 반해, 대중은 시간의 흐름과 군중 심리의 변화에 따라 기준을 변경하며 그녀의 정치적 올바름을 달리 평가한다.

 

이 단편집은 서로 다른 주인공을 내세우고, 이야기는 서로 맞물리는 부분 없이 오돌톨톨한 매음새를 노출하지만,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한다. 일상 속에서의 파란(물결 파 波, 물결 난 瀾). 그리고 파란이 불러오는 올바름(正)의 근원적 흔들림. <전조등>에서 그는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가 그녀에게 프러포즈했던 날 전조등에 비쳤던 사고(일 사 事, 까닭 고故)를 잊지 못한다. 실제로 사고가 발생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의(아닐 부 不, 뜻 의意)의 사고를 모른 척 함으로써 사고의 비극적 결말에 미필적 고의의 후행 가담자가 된다. 애초에 문제적 사건이 철저히 그의 의도와는 독립된 상태에서 발생한 일이었고, 아직 사건에 의하여 어떤 무고한 희생이 따랐는지 여부가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가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한 나름의 시도를 행했다는 점에서 그는 도덕적으로 무결하다. 동시에 그는, 일상으로 돌아온 이후에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았고, 그가 무고한 희생을 암시하는 뚜렷한 표식(우듬지 표 標, 알 식 識)을 오랜 시간 잊지 못하고 있으며, 그 긴 시간 동안 강력한 죄책감을 겪으면서도 일상의 안위를 위해 죄책감을 모르는 척하는 것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 문제적 사건의 미필적 고의범이다. 전조등 사건만 도려낸다면 그는 그녀를 포함한 일상적 세계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표본이라고 할 만큼 올바르지만, 시험에 들게 하는 이야기에 내던져지면서 그의 도덕성에 대한 평가는 점차 양가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본편의 주인공이 이름 없이 그로 지칭되는 데에서 독자는 섬뜩한 가능성을 읽어 낸다. 이런 불의의 사고가 불의(아닐 불/부 不, 옳을 의 義)를 잉태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다.

 

우리 형법에서는 고의와 과실의 유무를 판단할 때, 기대 가능성과 예측 가능성을 중요 기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법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아무리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논리와 양심의 영역에서 무결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 도저히 준수를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의 책임이나 예측 불가능한 범위의 결과를 방지할 의무를 지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전조등>의 그가 아니라 어떤 다른 일반인도 그의 상황에 처한다면 선뜻 자신의 행복을 깰만한 다른 행위를 선택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보편타당의 관점에서 눈이 오는 깊은 산속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하리라고 예상하고 미리 대비하거나 즉시 대처하는 것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어떤 고의나 과실로부터도 완벽하게 자유롭다고도 말할 수도 없다. <보편 교양>의 곽은 고전 읽기라는 선택과목을 개설하여, 학생들이 고전을 통해 교양을 쌓으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 사회는 어떤 곳인지에 대하여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이끌고자 한다. 그는 고전 읽기를 통해 그의 학생들이 보편적인 교양을 갖추고 바람직한 인성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학생들 중 누구 하나라도 자신이 무엇인가를 배웠다는 감각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면서도 그는 먼저 태어나 오랜 세월을 맞바꿔 얻은 지혜를 훗날 태어난 자들에게 전수해 온 선생(먼저 선 先, 날 생 生)이라는 유구한 역사는 이미 끝났으며, 일한 만큼 돈이나 받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는 이상적인 교육환경을 꿈꾸지만, 교실 내에서의 권력관계 형성을 경계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자는 학생들을 깨우지 않음으로써, 교실 내 권력구조 형성 및 고착화에 기여한다. 학교라는 사회 내적으로 선생의 권위는 이미 오래전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로 이미 고정적인 배경환경이 되었고, 외적으로 학교와 교류하는 사회는 자본주의, 실적주의, 무한 경쟁 주의가 만연화 되어 있으므로, 곽이 학교 안팎의 사회 흐름에 무의식적으로 동기화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구조적인 병폐를 고려했을 때 곽의 행위는 이해할만하다는 공감 정도는 얻을법하다. 그러나 누구라도 곽의 입장에 놓였더라도 어찌 달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해서, 그가 교육헌장이 용인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 합리화 될 수는 없다. 그는 보편 교양의 고취로 교실 내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인간이라면 갖춰야 마땅한 품위를 만들어주고 싶어 하면서도, 학업 성취도가 높고 자신의 가르침에도 유의미한 반응을 보이는 은재를 중심으로 교실을 운영하고, 나아가 그녀에 대하여 정량적 학업 성취도가 높은 학생 중에서도 ‘진짜’라고 표현한다.

 

<전조등>과 <보편 교양>의 평범한 중심인물이 겪는 신념과 현실감각 사이의 갈등 혹은 여러 가치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딜레마. 여기서 PC의 내재적인 논리 결함의 핵심이 드러난다. 일상에서 어떤 행위의 결과가 법률적으로 범죄로 정의될 만큼 명백하거나 차별, 분류와 같은 광의의 폭력의 범주 안에 속하는 것으로 판별되어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판단하여 정치적 부정(아닐 부 不, 바를 정 正)으로 공식화되기까지 상당히 복잡하고 정교한 판단 과정이 소요된다. 그렇게 결과로써의 정치적 부정이 명백한 것으로 규명되더라도, 그 결과와 원인행위의 관계성이 헐겁거나, 행위자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위에 대한 기대가능성이나 예측 가능성이 낮아 결과에 대한 책임 소재가 줄어들거나 책임이 조각되는 경우도 있다. 정치적 올바름 자체뿐만 아니라 인과관계, 책임의 조각 사유에 대해서는 다면적인 판단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타인의 신체, 재산, 정신 등에 위해를 가한 형사재판을 제외하고, 일상적 영역에서의 PC는, 객관적, 획일적, 형식적인 기준에 의존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사회적 환경에 연동된 개인의 주관적, 차별적, 비정형적 사고에 의해 정의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정치적 올바름을 근거로 개인의 올바름을 확립하는 것, 행위나 사고의 모범적 기준으로 미디어에 의해 보편적인 것으로 연출되고 널리 배포되는 PC를 채택하는 것은 바람직한 선택이 될 수 없으며, 인간의 실존에 어떤 의미도 없는 선택이다.

 

그럼 우리는 우리의 올바름을 어떤 모양으로 정하고,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무겁고 높은>의 송희는 100kg의 바벨을 들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던 지난날을 성실히 살아온 결과,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고 자신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지만, 비유도 상징도 빌리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100kg 바벨의 의미를 느낀다. 그녀는 스스로 약속한 자기 몫인 100kg의 역기를 들어 올리는 순간에 비로소 다른 약속을 할 수 있는 몸이 된다. 송희는 살면서 100kg인 많은 것들을 보고 들어 올리지만, 자신이 들어 올리기로 마음먹었던 모양의 100kg을 들어 올리고 나서야 뜨겁고 단단한 존재로 그녀가 정한 그녀의 세계 정중앙에 우뚝 선다. 그녀는 100kg 역기를 들어 올기 위하여 몰입했던 수많은 찰나에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왜 이것을 들어 올리는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진주와 니콜라이는 청년에게 조금 더 냉혹한 한국의 오늘을 살아가는, 체제 외에서 흘러들어온 이방인들이다. 그들은 기댈 곳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기대고 껴안아주며, 친한 사이가 되어준다. 그들은 그들의 관계를 연인이나 친구와 같은 평범한 범주에 포함시키기보다, 고유의 세계를 구축하는 쪽을 선택한다. 두 세계(Nation)의 교차(Inter). 이야기는 사람을 만들고, 수많은 이야기가 그 속을 가로지르는 모든 인간은 우주와 같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두 외국인(international)이 만난 순간이자, 우주라는 두 경계, 두 경계인이 만나 그 교차점에 지어 올린 또 다른 국제(international)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면 어떨까. 저마다 달리 생각하고 이해관계에 따라 흔들리는 정치적 올바름에 나를 맞추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들어 올리기로 한 것을 들어 올리면서, 나는 누구인지 나에게 물으면서, 그 대답과 상관없이 묻고 답하는 순간 덕분에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하면서, 본질적 자아로 존재하면서, 진짜 나로 실존하면서, 내가 결정한 나의 의미의 묵직한 존재감을 뜨거워진 몸으로 기꺼이 감당하면서. 신념과 먹고 산다는 질긴 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다 메타인지에 날카롭게 베어 남은 생채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선택하고 그 뒤에 남은 책임감만큼 주변에 손 내밀면서, 내게 맞닿은 우주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서, 받아들이면서, 안아주면서, 게으르고 폭력적으로 세상을 범주화하지 않고 서로가 사랑하는 이름으로 사랑이 만든 인터내셔널을 가만히 불러주면서. <롤링 선더 러브>에서 맹희의 흑역사가 사랑받은 이유는, 물건 고르듯이 사람의 조건을 재고 따지는 솔로농장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눈에 눈 맞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세계 반대편에 사는 누군가와 쉬이 연결될 수 있는 세상에 살지만, 우리는 눈앞에 만남을 진심으로 대면하는 태도로 사랑하자. 자신을 담당하는 카메라맨과 사랑에 빠진 맹희처럼.

 

<팍스 아토미카>의 나는 사랑이 상호확증파괴라고 믿는다. 현실적으로 사랑은 더 이상 서로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채워주는 낭만적인 행위라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 됐다. 집을 나서면 내가 가스 불을 껐던가, 에어컨은, 고데기는 안 끄면 정말 불날 수도 있는데, 같은 평범한 공포가 강박처럼 밀려올 때처럼. 내가 이 사람과 사랑하면 정말 행복할까, 돈은, 학벌은, 요즘은 집안이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결혼은 집안끼리의 결합인데, 같은 개인의 이상(다스릴 이 理, 생각 상 想)과는 거의 관련 없는 고민들이 강박적인 점검 과정을 거친다. 철저히 사회가 상정한 이상적인 결혼의 모습에 맞춰 사랑의 가치가 재단된다. 필생의 동반자를 타인의 기준에 따라 탐색하고 선택한다는 것. 우리 생의 주인은 우리 스스로 뿐이지만, 정작 중요한 모든 선택은 타인에 의지한다는 거대한 아이러니. 획일화된 이상과 조건은 비극마저 획일화한다. 인간은 결코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다.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을 만나 평범한 행복을 일구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이유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사랑이 상호확증파괴가 되어버린 이유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은 정치적,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만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내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그렇게 찾아낸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낼 수 있는 동물이다. 행복을 가두지 말자. 올바름을 가두지 말자. 우리는 가두지 않아서 갇히지 않은 상태로, 그저 사랑하면서 살자. 러브 인터내셔널. 우주가 서로를 스치는 찰나, 사랑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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