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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Oct 27. 2024

푹. 그래도 여전히.

<오렌지와 빵칼>, 청예, 2024

[오렌지와 빵칼 - 청예] 푹. 그래도 여전히.
 
조그맣게 얼룩이 번진다. 저걸 어떻게 닦아낸다, 마음이 초조해진다. 신문지에 물을 묻혀 닦아낼까, 부드러운 천을 가져와서 닦아낼까. 내내 고민하다가 뒤늦게서야 숙고의 결과로 닦아보지만, 헝겊이 지난 자리가 오돌돌 하다. 그 흔적을 지우려고 닦고 또 닦다가 엉엉 운다. 내 삶은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미련한 인간이다. 최선을 다해도 그 결과가 후회로 남는다는 점에서 능력은 턱없이 부족하고, 최선을 다하면 일정 부분이라도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지독한 낙관주의자며, 스스로가 능력이 부족한 지독한 낙관주의자임을 알면서도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들과 고민을 나누지 않는 것이 배려고, 온전히 혼자 책임지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얼룩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럼 그대가 떠나 얼룩이 남은 채 외따로 남을 것 같아서. 울며 얼룩을 지우는 사람이다.



보통 얼룩은 사라지면서 다른 얼룩을 남긴다. 학창 시절 환경 미화 시간에 유리창을 닦는 날이면, 이상하게도 유리창은 한결 깨끗해지더라도 닦아낸 흔적이 또렷이 남았던 기억에서처럼. 믿었던 친구들을 떠나보냈던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때마다 나는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에 지쳐있었다. 아무리 재빨리 다가가도, 아무리 열심히 닦아내도, 모든 얼룩을 지울 수는 없다. K는 그녀가 자신이 만든 얼룩과 그것이 주변에 주는 상처를 알면서, 그 모든 것을 외면했다. G는 내가 무엇이든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그것이 나를 위한 최선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번만은 괜찮다고 대답했다면 실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J는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보통의 나였다면 괜찮다고 말했을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K에게 이별을 고했다. G를 실망시켰다. J에게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 모든 순간을 후회하면서도 되돌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얼룩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사람이 내 얼룩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무례한 방식으로 내 의식 수준이 폄하된다고 내가 평가받은 그대로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무례에 대하여 그럴 수도 있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므로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난 지금의 나는 다시 미련한 인간으로 돌아와 얼룩을 지우면서 살고 있다. 무례와 무지에 괜찮다고 웃어준다. 타인의 언행이 가진 표면을 근거로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마를 재 裁, 끊을 단 斷)하는 것. 그 극악한 폭력에도 방긋이 웃어준다. 물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전히 잘 알지 못하는 탓에 내 마음이 편한 대로 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청예의 <오렌지와 빵칼>의 영아는, 이런 나의 모습과 무척 닮았다. 그녀는 자신의 내심을 드러내면서 살기보다, 상대적으로 추한 자신의 내심을 숨기고 통제하면서 살아내기를 선택한다. 애인, 친구, 직장 동료, 고객들, 그 주변의 모두에게 그녀는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잃지 않기 위해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입지를 줄인다. 행복한 기억이 별로 없는 사람은 자신이 불행한지 모른다. 자유가 없었던 사람은 자유의 의미를 모른다.



영아는 애인의 헌신적인 모습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지만, 애인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고 있기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친구가 자신이 믿는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할 때마다, 그녀의 논리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관점이 다르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에 따르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그에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녀는 또한 유치원 보육교사로서 아이의 미래를 위하여 적당히 훈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타인의 등을 발로 내지르는 아이들마저도 무조건적으로 사랑으로 보듬어야 한다는, 보육원 안팎에서 제시하는 기준에 자신을 욱여넣는 편을 선택한다. 그녀는 자신을 부정하는 무례한 상황들에 대응하며 강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자신 안에서 자꾸 고개 드는 ‘올바르지 못한’ 생각들을 조금씩 대면하게 된다. 누가 그 기준을 정했을까. 협의 과정 없이는 상생이 불가능한 다면적 존재들이 이룩한 다면적인 사회에서 절대적인 올바름이 존재할 수나 있는 개념인가.



자신의 가치관은 사회의 양심( 어질 양 良, 마음 심 心)을 선도하는 부류의 기준에 비하여 저열(낮을 저 低, 못할 열 劣)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괴로움에 시달리던 영아는 결국, 뇌에 시술을 가해 자유로워지기로 결정한다. 그의 애인과 문제적 보육원생인 마일스의 어머니가 추천한 연구소가 같은 곳이라는 사실이 못내 꺼림칙 하지만, 그녀는 이번만큼은 절박하다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히 따른다. 그녀에게는 그녀를 속박하는 주변의 정치적 올바름과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므로. 연구소가 약속한 시술의 효과는 고작 한 달이지만, 그녀는 단 한 달 만이라도 자유롭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렇게 떠밀리듯,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의에 의해 전두엽에 가해진 시술의 결과는 끔찍하다. 그녀는 폭력적인 자극을 찾아 헤매고 점차 그에 무뎌진다. 현대인이 작고 까만 액정이 내뿜는 도파민에 중독되는 것처럼. 극단적으로 자신을 통제하면서 살아오던 그녀는 이제,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처럼 연기하는 대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파괴적 본능을 드러내며 어떤 상황 안에서도 ‘스스로를 통제’ 하지 못한다.



시술의 효과가 끝나기까지 얼마 남기지 않고,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를 엄격하게 억제해 왔던 것이 자학적 행위였음과 동시에, 적당한 통제는 사회적 동물로써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생존방식의 일종이었음을 통감(아플 통 痛, 느낄 감 感)한다. 빵집 주인의 말처럼 상반된 두 쌍의 상태만이 반대되는 상태를 완벽하게 실감하게 한다. 영아는 자유롭지 못했던 날들보다 짧은 시간만을 자신에게 만족하고,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괴로워한다. 자유는 인간에게 주로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삶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자신과 타인에게 백해무익한 자유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인간에게 자유는 존재 그 자체로 의미 있기보다 책임졌던 만큼 주어지고 주어진 만큼 책임질 수 있어서 자유와 어떤 채무관계가 없고, 자신이 실현하고 싶은 의미를 실현하는 데에 있어 자유를 연료로 쓸 수 있으며, 또 그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을 때 그 의미가 있다. 영아는 자유의 의미마저 타인에 의해 재단당하고, 그에 의지한다. 나는 누구인가, 내게 자유는 어떤 의미인가. 영아는 고민과 책임 없이, 편리하고 게으른 방식으로 자유를 빚진 대가를 참혹하게 치른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적 자아와 합치하는 과정은 실존의 실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자아가 더 고매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 없이 얻은 자유는 속절없이 타락하기 마련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도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스스로에게 끝없이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따라서 타인의 의식에 대한 모든 가치판단은 인간이 서로 다르고 스스로도 완전히 알 수 없는 한, 그 자체로 무가치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다카마쓰는 가후쿠에게 말한다.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할 수밖에 없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드라이브 마이 카> (p. 51)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하더라도 자신을 직시하고 적어도 어렴풋한 가치관이나마 세우기 시작했다면, 이미 입체적인 존재다. 절대적으로 선(善)한 인간도, 절대적으로 악(惡)한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 세상에 완벽하게 순수함을 유지하는 존재가 존재할 확률은 0에 수렴한다. 해냈구나! 하고 감탄하는 수원, 억압과 자유는 나란히 놓일 때나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일즈의 엄마, 그리고 그 내력을 이어받아 You nailed it!이라고 소리치는 마일즈.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이는, 자신 안에 천진무구한 선과 백해무익한 악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다. 인간의 복잡 다단성을 대비를 통해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 앞에서 아연해진 영아는 분분히 일어나 그녀의 본질을 가리고 있는 껍질, 그러나 타인으로부터 부여받은 껍질을 벗어던진다. 그녀가 선물 받은 속옷과 셔츠를 벗어던지는 행위는, 자유의 존재가 당연한 자연상태에서도 그 존재 의미를 숙고하는 자만이 자신을 재단하고 입맛대로 이미지를 껴입히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그녀가 진정한 자유는 그 크기나 범위와 상관없이 존재가 구가하는 자유 또한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은유한다.



그녀는 자신이 혐오했던 인간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부정해야 하는 것은 선물 받은 셔츠, 속옷이 표상하는, 타인이 자신에게 씌운 껍질이지, 껍질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오렌지는 말캉한 과육과 뻣뻣한 껍질이, 허옇게 일어나는 속껍질을 사이에 두고 나란할 때도 여전히 오렌지다. 이내 곧 시술효과가 지속된다는 한 달이 지나자 달빛 아래에 선 그녀는 부끄러워한다. 이 본능적 수치는 그녀의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 억압 중에 어느 쪽에 기인했는지와 관계없이 그녀가 현재 어떤 상황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만을 단순하게 설명한다. 타인이 재단하지 않은,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자신이 원하여 선택한 모습. 그것이 설사 자신의 본질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마저도 자신이다. 내 안의 여러 자아의 존재를 인지하고 들여다보는 것은 입체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만난 모든 면면이 자기 자신이고, 그것들이 모인 결과가 또한 자기 자신이다.



얼룩은 얼룩을 낳는다. 네모난 방 한가운데, 녹음이 우거진 초여름을 담은 유리 액자 앞에서, 기어코 얼룩을 발견한다. 도와줘. 제발. 겨우 입 밖으로 꺼낸 말은 텅 빈 방을 겉돌다 햇살 속으로 산산조각 난다. 엉엉 운다. 그새 얼룩이 번졌는지, 창 밖 풍경이 온통 희뿌옇다. 이게 그렇게 나쁜가. 껍질을 벗기기 전의 오렌지의 향기는 그 과육만큼 새큰달큰하지만, 은근하고 딱딱하게 자기 속을 감추고 있다. 귤처럼 손톱으로 눌러 까기에는 껍질이 두텁고 뻣뻣하다. 겉모습으로는 상상하기 어렵게도, 불을 붙이면 바지런히 자신을 태울만한 기름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속은 촉촉하고 무르며, 기꺼이 손톱자국을 자기 몸에 새길만큼 연약하다. 그게 그렇게 나쁜가. 우리는 모두 얼마쯤, 연기를 하며 산다. 그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알지 못해 연기로 메워야 하는 부분들을 말없이 안은 채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노란색 사브가 수많은 이야기를 가득 싣고도, 기어를 변속하는 소리 한 움큼도 내지 않고, 숨죽여 앞으로 내달리듯이.



곱게 필링 된 오렌지의 마른 과육은 비록 주로 향기만 남은 상태이지만, 파운드케이크의 일부로 스며들어 이름도 당당하게 오렌지파운드케이크가 된다. 그렇다고 그 일부를 오렌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너는 이미 착한 사람인데, 모든 사람에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같다. 솔직해져 봐. 편하게 생각해. 왜 다 책임지려고 하니. 문제를 너무 너한테서 찾지 마. 문제를 남에게서 찾지 마. 말들이 빵칼이 되어 푹. 하고 나를 쑤신다. 어쩌면 이 흠집이 푹. 오래되고 곪아서 온통 마음이 쑤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내게는 그저 작은 흠집이 남았을 뿐이다. 껍질이 무른 곳을 찾아 들어온 칼날에 향기로운 속살까지 푹. 크게 베어갈지도 모른다. 빵칼이 갓 구운 빵의 속살을 얇게 저며, 싱그러운 오렌지 향은 허공에 뿌연 김으로 일렁이다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오렌지일 테고, 충분히 향기로울 테다. 빵칼은 오렌지를 벨 수는 있어도 자를 수는 없다. 옆가지에 열린 소중한 열매에 너무 무례하지 말자. 각자의 열매의 맛과 향은 각자의 몫이다.



아, 나는 그래서 빵칼을 쥔 오렌지마저 사랑한다.  “아마 실망했을 거야”하는 목소리가 you nailed it!처럼 맴돈다. 나 사실 너한테 엄청 무례하게 군적이 있어.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너한테는 자꾸 그렇게 되더라. 너랑 계속 얼굴 보고 싶어서 얘기하는 거야. 솔직함으로 포장한 완벽한 악의 앞에서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 칼날에 향기로운 나의 조각이 점점이 맺혀 있다. 그 모양새마저 사랑스럽다. 하얀 칼날에 동글동글 웃는 얼굴로 과즙이 젖어든다. 말없이 그 여울지는 자욱을 마주 보고 웃는다. 기꺼이 벌어진 껍질 사이로 실컷 향을 자랑하다가, 자르지 못하고 푹. 베어낸 그 칼집을 따라 찬란한 빛으로 벌어질 테다. 그게 당신의 마음이 칼을 휘두른 이유라면. 어떻게든 살기 위해 택해야 했던 길이었다면. 쉬이 무르지 않고 단단한 살결로 나는 괜찮다고 말할 테다. 내 흔적이 묻은 칼날을 닦아주기 위해 껍질 한 조각을 나눠주리라.



세상에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상에 대하여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 축복 속에서, 나를 가여워하는 이가 가여웠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부감에 천착하며 나를 친구라 불렀을 복잡한 마음이 안쓰러웠다. 이건 기분 나빠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안 그렇다고 했으면 진짜 실망할 뻔했어. 의식 수준의 층하를 나누는 본능이 기구했다. 너는 모든 사람에게 착하고 싶은 것 같다. 그건 네 욕심이야. 타인의 가치를 마음껏 재단하는 무모함이 슬펐다. 삶이 주는 고통 속에서도 타인을 위해 애쓰는 마음이 당연하게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는 나는 얼마나 가련하고 안쓰러우며 기구한 인간이던가. 나는 그들과 나를 견주면서 우월감에 젖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고, 삶은 계속된다. 그랬구나, 나는 전혀 못 느꼈어. 괜찮아. 기분 나쁘지.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해. 진심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할 뿐이다. 물론 어떤 선택도 마음 편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으니 괜찮다는 생각에 귀 기울이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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