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녘 연필소리 Oct 27. 2024

가장 빛나는 눈

<가장 파란 눈>, 토니 모리슨, 1970

[가장 파란 눈 - 토니 모리슨] 가장 빛나는 눈

모두가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 집 막내, 14살 차이 나는 내 동생은 또래 친구들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부모와 야무지고 말 많고 거친 누나들 밑에서, 그 또래 아이들이 겪는 보통의 것과는 다른 종류와 모양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종종 사랑의 다른 이름이 그를 밀치기나 혼내기도 했지만 아이는 누나들을 닮아 재미있고 유쾌하며 사교성이 좋은 아이로 자랐다. 대한민국의 10여 년 전쯤, 시골에서는 혼인양상의 특수성상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교에 진학하기 시작했다. 평생 고장을 지키고 있었던 어르신들 눈에, 그리고 그런 어른들 밑에서 자란 아이들 눈에도, 피부색이 다르거나 출신국가가 다른 누군가와 그 누군가가 이룬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는 낯선 존재였고, 신기한 구경거리였으며, 그래서 늘 외로워하는 존재였다. 내가 본 적 없는, 겪어 본 바 없는 것들에 대한 공포. 자신의 시선이 틀렸음을 인정할 수 없는 자존심. 폭력은 힘이 세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름의 명분을 갖추고 혐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하나같이 게을렀던 폭력의 가해자들은 일반화라는 편리한 방법에 기대 자신이 휘두른 폭력을 합리화했다. 아이들은 남북전쟁에 대하여 배우고 마틴루터 킹이 누군지에 대하여 배우면서도 옆자리에 앉은 동급생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 그를 무시하거나 애써 모른척했다. 그런 시대였다. 셋째와 넷째가 태어나 유치원에 가고 학교에 갔던 시절은.

아직도 그 애들의 유년시절이 눈에 선하다. 동생들이 가지고 태어난 몽고반점, 부처님이 얇디얇은 실로 그 중간을 매듭 지어 놓은 것 같은 통통한 엉덩이와 포동포동한 팔다리, 셋째가 새끼오리들처럼 언니들을 따라다니며 언니언니 부르던 것, 남동생이 그 모습을 흉내 내며 누나들을 인니인니하고 부르며 따르던 일. 천연한 웃음. 그 모든 일들이 사랑스러웠다. 그중에서도 더욱 사랑스러웠던 것은, 혐오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혐오의 호시절에도 단단했던 막내의 차별 없는 시선, 혐오가 만연한 또래 사회에서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고도 조용히. 그저 우리는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한 공평한 손길이었다.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아이였다. 막내의 유치원 졸업 사진에는 막내와 잘못 없이도 자주 울어야 했던 아이의 해사한 우정이 고스란하다. 막내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다른 것은 다를 뿐이었다. 그런 것들이 참 사랑스럽고 지금도 날 목 메어 울게 한다. 폭력을 되물려 주고 되물려 받던 시절을 아이들은 끊어냈다. 대단한 용기도 결심도 사명감도 없이. 그저 영문도 이유도 모른 채 혐오를 받아야 했던 친구들과 어울리고 미끄럼을 타고 강둑을 따라 달리면서.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고향의 모습 중 하나다. 그러나 어디선가에서는 그 지독했던 시절이, 아직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무차별적 혐오의 전이(구를 전 轉, 옮길 이 移) 결과로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어린 소녀. 그 모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다, 혐오 사회의 일원으로 점차 편입되는 소녀의 저변. 토니 모리슨의 초기작 <가장 파란 눈>은 피해자와 관찰자로 어린아이들을 내세워 근현대의 공동체, 특히 거대 단위적 폭력의 피해자로 구성된 흑인 사회 내부에서마저 폭력이 만연함을 조명한다. 아이들은 폭력의 생리에 무지하고 그 역학관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작품이 조명하는 장면을 객관적으로 옮기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또한 아이들을 이야기의 중심에 둠으로써, 권력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폭행의 구조에 무감한 아이들마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점차적으로 혐오와 차별을 체화해 나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로써 혐오는 작은 연료로도 스스로 증식하며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 차별의 형태로 ‘아래’에 고여 내내 머문다는 관점을 사실적으로 조명한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가 자유를 위해 도망친 흑인 노예 세서와 세서가 너무 사랑했던 죽은 딸 빌러비드의 이야기가 아니라, 편견 속에서 살아가고 혹독한 시선 한가운데에서 버티면서도. 그 지옥에서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든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요컨대 <빌러비드>가 지옥에서 사랑이 탄생하고 발전하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본작은 지옥이 어떻게 조성되고 사랑을 짓밟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본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차별과 혐오가 공동체를 침잠시키는 과정을 그리는 과정에서 폭력이 자가적으로 자신의 증식과 고착화를 체계적으로 설계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인 페콜라는 파란 눈을 가지고 싶어 한다. 페콜라는 어린 나이부터 기형적인 애정관계와 가정의 폭력성에 노출된다. 고통과 인고(참을 인 忍, 쓸 고 苦)의 시간이 당연했던 작은 소녀의 삶은 문제적 상황에 대한 자각(스스로 자 自, 깨달을 각 覺)이나 외부적 구원(구원할 구 救, 도울 원 援)이 아니라, 그녀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에 대한 지각(알 지 知, 깨달을 각 覺)에서 온다. 파란 눈을 가진 메리 제인과, 자애로운 어머니와 멋있는 아버지, 귀여운 강아지, 초록색과 흰색이 섞인 아담한 집과 빨간 문. 페콜라는 기형과 추한 외모 때문에 스스로 자기 멸시를 일삼는 어머니와, 양친에게 버림받고 백인 남성들에게 모욕을 당했던 기억 때문에 자신을 당시 백인이 생각했던 흑인 남성의 전형에 맞추는 방식으로 혐오를 피하려는 아버지 밑에서, 폭력적인 양육방식을 겪으며 자란다. 그녀가 푸른 눈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자기혐오의 내재화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이 비극에는 메리 제인의 환상을 확대 재생산하며 미와 정상의 범주를 획일화시키는 백인 사회와 미디어에도 책임이 있지만, 브리드러브 가(家)와 같은 공동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콜라의 피학(입을 피 被, 모질 학 虐)을 모르는척하거나 직접 학대하기도 했던 친구들, 특히 브리드러브 일가를 혐오로 대했던 모든 어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어린 소녀가 가장 파란 눈을 원하는 정념에 갇혀 가을, 겨울, 봄, 여름을 지나는 동안, 누구도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자기혐오는 외로움 안에서 체계적으로 내재화되고, 그녀는 자기 분열을 겪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누구보다도 푸른 눈을 갖고 싶어 안달나한다.  

본작의 화자인 클로디아와 그녀의 언니 프리다는 본작의 배경이 되는 시절에 아직 타인을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것이 낯설다고 느낄 만큼, 인간이 가진 다름 사이에서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자매 역시 페콜라보다 운이 좋았을 뿐, 학교 내에서 인종과 생활의 빈한(가난할 빈 貧, 차가울 한 寒) 때문에 차별을 당하고, 믿었던 사촌 이웃에게 추행을 당하였으며, 결정적으로 페콜라의 인생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역겨운 오용(그르칠 오 誤, 쓸 용 用) 때문에 철저하게 무너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되는 등, 직간접적인 폭력적 상황에 끊임없이 노출되며 조금씩 순수성을 잃어간다. 작지만 일상적인 디테일은 사람을 뿌리에서부터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침식한다. 클로디아와 프리다에게도 질투의 대상이 생기고, 서로를 시기하기도 하며, 종국에는 페콜라보다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나은 상황에 있음을 의식하며 안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페콜라가 어린 나이에 겪은 비극적인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알면서도 피해자인 그녀를 모욕하는 공동체 내의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이 소녀들만이 페콜라가 건강하게 아기를 낳기를 기원하며 금잔화 씨앗을 땅에 심는다. 금잔화는 노란 꽃송이의 화사함이 무색하게도 비탄, 실망, 비애를 뜻한다. 속명 Calendula는 로마인들이 달의 초하루를 calendae라고 부르고, 이 작은 꽃이 한 달 동안 피는 데에서 유래한다. 화상, 탕상, 각종 염증, 햇볕에 탄 피부에 좋다는 한 떨기가 왜 비가(슬플 비 悲, 노래 가 歌)가 되었을까. 검은 땅은 끝끝내 아이들을 위하여 작은 금잔화 한송이도 틔워 주지 않고, 저마다 시작점이 다른 혐오는 여전히 땅 위와 속을 요요하게 흐른다. 오염된 지하수는 땅을 구석구석 불모(아닐 불 不, 털 모 毛)로 만든다. 그러나, 몇 번의 가을, 겨울, 봄, 여름이 지나고, 낙엽, 눈, 꽃, 비가 나리다 보면, 내림굿처럼 질긴 흐름도 희미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제 금잔화가 싹을 틔우지 못한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씨앗을 제대로 심고, 척박한 땅에서도 싹을 돋우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작고 연약한 얼굴에서 어떤 누구를 발견해도, 모르는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니 모리슨의 데뷔작인만큼 다른 작품보다 상대적으로 아쉬움이 남는 지점도 있지만, 본작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소녀들의 눈을 통해 보여준 작가의 통찰이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저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포, 폭력, 차별, 그리고 반복의 역사를 그린 에두아르 루이의 <에디의 끝>은, 에두아르 루이 자신이 에디 벨괼이던 시절, 자신이 겪은 악의 평범성의 확산에 대하여 회고한다. 여러 지점에서 본작은 <에디의 끝>과 내밀하게 착점을 공유한다. 구조적, 사회적으로 양육 방식으로의 폭력이 묵인되고, 폭력으로 양육된 아이들이 자라 어떤 사회를 이루며, 또 어떤 아이들을 키우게 되는지에 대하여 담담하고 자세하게, 그래서 폭력적일 만큼 충격적으로 묘사한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조금이라도 기저에 폭력이 침투한 어떤 사회에서라도, 어떤 상황에서라도, 알맞은 내지는 맞는 명제로 작동한다. 성적 지향성, 타고난 기질, 가치관을 포함한 선후천적 모든 측면에서 에디는 차별과 혐오라는 끝없는 폭력을 감내하여야 했다. 에디의 가족은 그들의 경제적 능력 때문에, 에디와 에디의 형제들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차별과 멸시, 혐오를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지역 사회 내 더 가난한 이웃이나 그들과 피부색이 다른 이웃들을 혐오하고, 그들에게 종종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고, 문명이 발전해도, 지역이 달라도, 악은 그렇게 한쪽에 웅크린 채로 침투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 토니모리슨의 1960년대와 에두아르 루이의 1990년대가 데칼코마니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절망적이다. 그러나 침투당하지 않고 잠식당하지 않기 위한 작은 노력들이 이 순간에도 산산이 부서지거나, 유효하게 자리를 지키거나. 그 결과에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회가 발전하고 시대가 나아간다고 하여 저절로 나아지는 것은 아니기에. 그저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 혐오의 시절을 기억하고. 나아가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뿐이다.

대부분의 자기 냉소 내지 자기혐오는 인간 존재에 대한 그것으로 번지기 쉽다. 반면 자존(스스로 자 自, 높을 존 尊)과 자신(스스로 자 自, 믿을 신 信)은 인간에 대한 존중과 믿음의 밑거름이 되고는 한다. 그리고 숙명적 갈림길에서의 선택에서 중요한 요소가 단연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 우리 세계를 잣는 모든 재료 그 자체가 된다는 관점에서, 자기 존중과 신뢰, 즉 자신에 대한 탐구와 그에 따른 자신에 대한 애정은 인간애의 기반이 된다. 흑인들이 노예의 삶을 겪으며 살아야 했던 험난한 여정에 대하여 처절하게 담아냈던 토니 모리슨은, 본작을 통해 차별이라는 병적인 구조가 재생산을 거듭하며 고착화된 이유를 자기 성찰적 태도로 분석하고 있다. 본작은 상대적으로 소수 인원으로 구성된 커뮤니티 내에서 오히려 혐오가 팽배하는 이유를 자기혐오에서 찾고 있다. 인간은 모두 다르고, 저마다 고유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지옥은 이 각자의 스타일에 가치를 매기고, 가치 간의 우열을 가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타인은 물론이고 자기 스스로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각자가 가진 잣대로 그 어떤 스타일의 값어치도 따질 수 없다. 그리고 지극히 비논리적인 이 계산행위는, 사회적 약자층이 행하였을 때 철저하게 자신에게 불리한 결괏값을 도출할 수밖에 없다. 기준은 기형적이지만 동시에 보편적일 수 있고, 이런 비정상적 기준에 의해 가치절하된 계층일수록 자신에게 불리하게 저울질할 수밖에 없다. 나름대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기준으로 짜인 잣대의 눈금이 말한다. 너는 비정상이야. 너는 쓸모없어. 까만 눈은 대답한다. 내 눈이 파란색이면 좋겠어.

사랑은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이다. 어떤 존재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그 존재가 잘게 흩어지는 게 싫어서 내 손으로 흩트려내 버리는 것. 누군가에게는 그 존재를 쥐었을 때 부수어질 것을 알아서 손 틈새로 흘려내는 것. 누군가에게는 내가 받은 상처가 너무 깊어서 상대에게도 그 상처를 내고 싶은 것. 누군가에게는 상대에게 난 상처가 너무 깊어서 손만 닿아도 망가질 것 같아 전전긍긍하는 것. 누군가에게는 말해주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는 것. 누군가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어 알 수 있는 것. 제각기 다른 사람의 모습만큼이나 누군가를 너무 사랑하는 어떤 이의 모습도 다양하다, 다르다. 어떤 사랑은 사랑 자체보다 사랑이라는 관계를 이루는 사람이 더 중요할 때도 있고, 사랑이라는 이름을 한 어떤 악마적 행위는 그 사랑과 관계된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릴 때도 있다. 다름의 괴력. 사랑의 오남용(誤, 넘칠 남 濫, 用). 그러나 그런 것이 세상을 이루는 진정한 사랑의 중요성마저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모양대로 세상에 남기는 사랑은, 무엇은, 무엇이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고 믿는다. 시간이 지나 누군가가 사라지고 그가 한 사랑이, 무엇이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라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자리에 그가 서있는 이유는 그동안 이 자리를 향했든 그러지 않았든 그가 이 자리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어떤 길로 한 발짝 더 걸을지 어떤 속도로 걸을지, 어떻게 틀어 더 걸을지, 아니면 조금 뒷걸음 해서 이 길이 맞는지 생각해 볼지, 그 모든 기로에서 어떤 결정을 했기 때문에 그 지점에 서있는 것이다.

어떤 점에 닿았든 그곳에 서있는 모두의 모습은 그간의 결정이 만들었다. 나는 이를 선택적 숙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데, 어떤 선택을 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맞닿게 되는 모든 순간이 결론적으로는 각자가 선택한 숙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찰나들은 결국 영겁의 세월에 남아 흐른다. 남아있다.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어떤 존재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은 손을 내미는 것이다. 이제 괜찮으니 일어나서 살아가자 말하는 것이다. 지워지지 않는 일이지만 그러니 잊지 말자 말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검은 땅에 요요하게 흐르는 물줄기에 내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하여.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할 수 없어서 끝내 미워해버리고야 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하여. 혐오가 혐오를, 폭력이 폭력을 낳도록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하여. 내가 또 다른 페콜라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하여. 우리는 함부로 미워하지 말 것이다. 함부로 폭력적이지 말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대답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의 나 역시 악의 평범성의 한 축이며, 유죄일 것이다. 그 대상이 비록 자기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아, 모든 것은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다음 여름엔 까만 들에도 노랗게 한가득 금잔화가 피면 좋겠다.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쳐든 여린 얼굴이 그 어떤 눈에도, 너 눈이 참 예쁘게 빛난다. 하는 소리가 온 세상에 가득하도록. 중요한 것은 색깔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빛의 결정(맺을 결 結, 맑을 정 晶) 임을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이전 11화 푹. 그래도 여전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