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나와의 이별
<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2024
[사라진 것들 - 앤드루 포터] 어제의 나와의 이별
정치(정사 정 政, 다스릴 치 治)란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메커니즘이다. 일상에서 먼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일상의 경계를 넘어와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때, 인간은 결코 효과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다. 특히 정치와 같이 본질적, 종국적으로는 우리 일상과 깊숙이 맞닿아 있으나 평범한 일상에서는 영향력을 확인하기 어려운 영역이 불쑥 생활에 개입하면, 이에 대한 대응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아빠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공직에 봉직하셨다. 아빠가 좋은 아빠이자 남편이었는지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적어도 직업인으로서 좋은 공직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퇴직한 지 2년이 지나지 않아 아빠는 긴 공무원 경력을 살려 준공공기관의 센터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른바 재취업이었다. 그리고 취임한 지 한 분기만에 한 직원이, 주말에 홀로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 60대 노인이 된 아빠를, 의자, 화분, 거울, 가족이 만들어준 대리석 명패로 내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드센 세월에 얇아진 온몸이 무차별 폭행에 속수무책으로 노출 됐다. 아빠는 명백한 피해자였고, 재판부는 가해자에게 특수폭행의 책임을 물었다. 이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의 직장은 지자체의 집중 감사를 받았다. 감사팀은 아빠의 업무에서 흠결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결국 센터의 인적 구성을 대대적으로 조정하고, 지자체에서 기관을 직접 운영하겠다고 통보했다. 아빠는 사직서를 냈다. 정치에 있어서 바름(正)은 일상의 바름과 다를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 아빠와 아빠의 지지자들은 무색하리만치 무지했다. 나는 가여운 아빠를 위해서 봄날 내내 울었다.
가끔 내 세계를 뒤흔드는 거대한 일, 예컨대 이별, 실패, 상실, 만남, 성공, 회복과 같은 사건을 겪은 이후에 거울을 보면, 그 안에 비친 스스로가 놀랍도록 낯설 때가 있다. 그 안에 있는 내가 사건 이전의 나와는 다르다는 감각. 그 생생한 경험 속에서 내면의 변화가 표면적으로, 물리적으로 드러날 때가 있다는 사실에 매번 놀란다. 어쩌면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람의 성격은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래서 얼굴만 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견해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미처 그 미세한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은 매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다만 인지할 수 있을 만큼의 큰 변화는 큰 사건에 뒤따르므로 그러한 큰 사건 뒤에 따르는 변화만 감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빠도 그랬을까. 아빠 서재에서 한숨 소리가 들리거나, 아빠가 거울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거나, 먼산을 응시하고 있을 때, 아빠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스스로가 낯설다고. 무엇인가가 변하고 말았다고. 인간에게 심지어 물리적 변형을 가할 정도로 가장 커다란 사건, 감정은 주로 어떤 것이 되는가. 아마도 그에 대한 대답이 변화가 일상처럼 벌어지는 우리 삶의 중요한 관절은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버닝>에서 해미는 종수에게 마임의 기본 원리를 속성으로 전수한다. 어떤 것이 없는데 있다고 믿고 연기하는 것, 혹은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지만 없다고 믿고 연기하는 것. 명백한 진실을 부정하는 방식의 연기는 철저히 기술적인 차원의 것이고, 따라서 둘 다 어려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고 믿고 연기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한다. 상실(죽을, 잃을 상 喪, 잃을 실 失)은 그 대상의 존재성에 대한 전제와 상관없이 감정의 주체에게 강력한 타격을 준다. 실존했던 그것이 사라져도, 그것이 실재하였다는 전제가 불가능한 가정으로 판별 나도, 심지어 그것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상실감(喪失感)을 느낄 수 있고, 감정적으로 붕괴할 만큼 강력한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물론 그 존재가 중요한 것일수록 존재 혹은 부존재에 따른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인간에게는 그 존재를 부정하는 가정(거짓 가 假, 정할 정 定)만으로도 상처가 될 수 있는 삶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있고, 당연하게도 그 상실은 인간을 크게 변화시키는 변곡점으로 기능한다.
앤드루 포터의 <사라진 것들>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이기보다 자유, 희망, 믿음과 같은 관념들이고, 따라서 그 관념들의 상실에 의해 인간의 일상에 균열이 생길 수 있고, 나아가 삶이 붕괴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해미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실로 인해 인생의 변화를 겪는 본작의 주요 인물들은 리틀 헝거보다는 그레이트 헝거에 가깝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관(값 가 價, 값 치 値, 볼 관 觀)의 상실이나 부재에 슬퍼하고 목말라하는 사람. 일상의 신경질적인 균열에 어리둥절하다가 문득 거울 속에서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 본작은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나’의 목소리를 빌어 상실의 목록을 완성한다. 형식적으로 단편소설의 모음처럼 보이는 본작은 사실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편의 이야기에 다름없다.
<오스틴>의 ‘나’는 자신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밤늦은 시간까지 모여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친구들,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묘한 상실감을 느낀다. <마야>의 ‘나’는 동거했던 연인 마야와 헤어졌던 기억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나’는 또한 그녀가 그녀에게 작업실을 빌려주고 ‘나’와도 종종 왕래했던 화가의 화폭에 누드로 ‘실린 것 같다’고 생각했고, 지금까지도 그 모델이 마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첼로>의 ‘나’는 첼리스트인 아내 내털리가 병 때문에 커리어를 상실하는 모습을 안타깝고 슬픈 마음으로 지켜본다. 그는 아내가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깊숙한 내면으로 들여줄지 궁금해한다. <라인벡>의 ‘나’는 대학생 때부터 평생 모든 것을 공유하며 함께했던 친구 리베카와 데이비드를 상실한다. 그는 심지어 리베카와 데이비드가 결혼하고 뉴욕에서 라인벡으로 이주하자, 그들의 권유에 따라 계획에 없던 이주를 하기도 한다. 몇 년 후 그는 친구 부부가 자신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스틴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음을 알게 된다. 이주 문제를 둘러싼 신경전으로 인해 세 친구의 일상에는 균열이 생기고, 술에 취한 리베카가 대학시절에 ‘나’를 진심으로 좋아했다고 고백하며, 비로소 ‘나’는 사소하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자신이 다 잊고 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알라모의 영웅들>의 ‘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상실한다. <히메나>의 ‘나’와 아내는 아랫집 이웃 히메나를 통해서 인간관계 자체가 주는 온정을 마주하지만, 얼마 못 가 히메나가 사라지자 그녀를 통해서 만났던 사람의 온기와 위로도 함께 상실한다.
그리고 이 수많은 ‘나’들은 상실의 목록에 항목화 된 몇 글자 너머에 상실의 본체가 따로 존재한다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감각 때문에 일상에 전에 없던 동요를 겪는다. <숨을 쉬어>의 ‘나’는 아들이 호흡 곤란을 겪을 때마다 공황을 느낀다. <실루엣>의 ‘나’는 가까운 동료이자 친구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믿고, 그의 집에 갈 때마다 티 나지 않게 조금씩 물건을 훔쳐 온다. <벌>의 ‘나’는 집 주위에 몰려드는 벌들 때문에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들은 심각하다고 진단할만한 문제를 겪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가 누구나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사고(일 사 事, 예 고 故)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 또한 선명히 인지한다. 이는 그들이 본질적인 문제를 표상하는 물리적 현상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숨을 쉬어>의 ‘나’는 아들이 겪는 호흡 곤란 증상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아들을 병원에 데려간다. <실루엣>의 ‘나’는 동료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자신의 절도행위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물건을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떳떳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벌>의 ‘나’는 양봉업자를 불러 벌떼를 처치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가 공허한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그칠 뿐 본질적인 문제는 미제로 남아 악화일로로 곪고 있기 때문이다. 응급처치를 해도, 문제를 고치려고 노력해도, 전문가에게 문제 해결을 의탁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외려 그 정도가 심해진다. 그들이 겪고 있는 사건, 사고가 전문가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쉬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설정은 본질적인 문제는 이 현상 너머에 존재함을 내재한다. ‘나’들은 자기 자신을 직시하지 않고, 문제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며, 더 이상 세계 안에서의 자신의 의미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문제, 그들이 진정으로 상실한 무엇이다.
본작에 등장하는 수많은 ‘나’가 상실한 것은 젊음, 연인, 가족의 안녕, 주마고우, 사랑, 이웃으로 제각각이지만, 상실의 목록을 포괄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상실이다. 젊고 패기 넘치는 시절이 지났다고 해서 삶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떠난다고 해서 사랑한 순간이 헛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내의 커리어가 위협받는 것은 가족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장애가 될 수는 있지만, 필연적인 결론이 가정의 파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친구나 연인, 다정한 이웃은 물론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지만, 타인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삼고 인생을 운용할 수는 없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소중한 관계가 상실된다고 해서 인생이 실패에 가닿는 것은 아니다. 형식적인 가치보다 본질적인 의미를 갈구하는 그레이트 헝거가 해 질 녘 들판에서 온몸을 불태우는 춤으로 간구하는 것은 외재하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 안에 내재하는 ‘나’의 의미, 본질적 자아의 발견과 그에 대한 이해, 그리고 합치다. 따라서 어떤 외재적 의미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잃지 않고, 흔들리되 부러지지 않으며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자신이 자기 자신일 때만이 가능하다. <히메나>에서 ‘나’와 아내는 방황하는 어린 예술가이자 다정한 이웃인 히메나를 만나, 그들이 걷지 못했던 길, 혹은 걸어왔던 길을 다시 마주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끌리는 이유를 담배와 음악이 아니라 숨 쉬고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위로에 한정하고, 애써 자신이 히메나를 통해서 발견했던, 어떤 삶을 살아내고자 했던가 혹은 지금은 어떤 오늘을 살아내고자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외면한다. 요컨대 ‘나’들이 왜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삶이 무너질 위기에 봉착하는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은, 그리고 무너지지 않고 위기를 진정으로 해결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상실하지 않고 자신이 정한 자신의 의미를 내재한 오늘을 오롯이 살아냄으로서만 가능하다.
본작의 표제작 <사라진 것들>은 본작이 각기 다른 1인칭 화자를 내세워 이야기해 왔던, 상기한 모든 바를 함축한다. ‘나’는 친한 친구였던 대니얼의 실종 소식을 듣게 된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면서도 ‘나’는 그날의 스케줄을 취소하고 혼술을 하면서 맘을 달랜다. 급한 생업 현안을 처리하고 뒤늦게 대니얼의 집을 찾지만, 여전히 대니얼은 돌아오지 않은 상태고, ‘나’와 아내 타냐는 모두 대니얼과 각별한 사이였기에 대니얼의 실종을 기점으로 일상에 균열이 스미는 것을 느낀다. 몇 달 후 대니얼의 가족들과 그의 연인 앙투아네트는 대니얼의 장례식을 치른다. 앙투아네트와 함께 대니얼의 삶이 남긴 흔적을 정리하면서, ‘나’는 대니얼의 결말에 대하여 생각한다. 사라져 버린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쩌면 대니얼이 의도적으로 사라지기를 혹은 모든 것을 끝내기를 원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p.316). 그리고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에서 길을 잃고 혼자 있었을 대니얼을 생각하며,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고, 바깥세상의 누구도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을 거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힘들었을지(p.324)에 대하여 생각한다. 본 표제작은 ‘나’와 타냐, 앙투아네트라는 상실의 주체를 다층적으로 설정하여, 상실의 무게와 영향,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방식이 저마다 다름을 표현한다. 또한 ‘나’와 앙투아네트의 대화의 주인공을 고인이 된 대니얼로 설정함으로써 대니얼 역시 타냐, ‘나’, 가족과의 원만한 관계 등 삶의 중요한 요소를 상실한 인물로 읽히게끔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들의 슬픔은 하나같이 지극하지만, 이 사랑이 지나가고 슬픔만 가라앉은 자리를 떠나야 할 때가 되면, 예전과는 다른 삶을 어떻게 살아낼지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나’는 앙투아네트와 보낸 이틀이 기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대니얼의 집을 떠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반면 앙투아네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으면서도, 앞일을 걱정하기보다 당장은 다른 곳에 있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하루키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이야기하였듯이, 낙하하는 자신을 받아내 줄 이는 나 자신뿐이다. ‘나’가 조슈아트리에서 길을 잃고 홀로 헤맸을 대니얼을 떠올리며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을 현실이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지에 대하여 논하는 대목에서 독자는 ‘나’가 길을 잃고 흔들리는 자신을 누군가가 잡아주길 바라는 사람임을 눈치채게 된다. 어디까지나 대니얼의 상황을 삶에 대한 은유로 해석했을 때에 국한되는 이야기지만, 이 여정에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그에게서 위안을 받으면서 함께 걷더라도, 불확실한 벽 아래로 떨어지는 자신이 안전하게 현실에 안착시킬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인간의 본질적 자아, 인간의 존재 의미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발견하고, 부여할 수 있다. 상실은 거대한 비극이고, 그 이후의 삶은 결코 예전과 같아질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리고 치유와 회복은 우리 우주에 남은 다른 사랑들에게서 에너지를 얻더라도, 오롯이 자기 힘으로만 이룩해 낼 수 있다.
산다는 것이 진정한 자아를 찾는 긴 여정이 맞다면, 어제까지의 나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더 이상 거울 속에 비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여정에 유효한 흠결이 생겼다고 볼 수 없다. 사라진 것들이 있고 그리하여 많은 것이 바뀌어도, 내가 여전히 나라면 어떤 것들이 사라지고 바뀌었다는 사실은 그저 표면적인 현상일 뿐, 진실이 될 수 없다. 과거의 모든 순간과 그때의 자신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 사라지지만, 동시에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현재, 실제의 자아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수많은 순간을 살아낼 수많은 또 다른 ‘나’가 자신의 선택과 행동의 밀접한 관계성을 부여할 진정한 자아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구조적으로 인간이 겪어내는 모든 순간은 모든 후일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적 자아를 발견하고 그와 화해함으로써 본질적 자아와 합일에 이르는 그 순간, 필연적으로 나를 이루는 모든 자아는 동시다발적인 화해에 이르고, 사라진 것들과 아직 존재하는 것들 또한 진정한 자아와 조응하는 행동으로, 말로 우리 우주에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상실은 찰나의 순간 여전히 상실이되, 영겁의 시간을 사는 흔적이기도 하다.
삶은 오로지 삶의 주인만의 것이다. 물론 모든 영혼에게는 포솔레 수프가 필요하다. 함께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히메나가 필요하다. 질기고 모진 생업의 시간이 끝나면 발코니에서 음악을 들으며 피우는 담배 한 개비가 필요하다. 점점 사회가 각박해지는 것이 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그래서 위안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모든 ‘나’들은 여전히 사라진 것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가만히 내 속을 들여다보면 사라진 것들이 남아 바글바글 포솔레 수프를 끓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정한 위안은 내 삶에서 온다는 사실이 내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른다. <사라진 것들>의 모든 ‘나’ 들을 보면서, 나는 나의 미래를 보았다. 그리고 나의 아빠를 보았다. 여전히 가여운 그는 힘 없이 희미하게 웃고 때로 자신이 나약해졌음을 슬퍼하며, 젊음과 영향력, 무엇보다 소속을 상실한 자신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고 박장대소하고, 가끔 카톡으로 소소한 농담을 건네고, 어디에도 소속하지 않는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작을 담담하지만 유쾌하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아직도 나는 나의 아버지를 때린 누군가의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다. 일련의 사고를 부덕의 소치라고 자책하는 나의 아버지가 가여워 견딜 수 없다. 그러나 60여 년간 함께 살아온 자신의 모습과 작별을 고하면서도, 그 가지런한 하얀 이를 내놓고 웃는 그를 응원하는 것이, 그가 스스로 선택한 존재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품격을 인정하는 것이,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앞으로도 나는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들 앞에서 무참히 무너지고, 그 흔적을 그러모아 일어나 단려하게 걸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일 때, 나를 잃지 않을 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상실해도 상실하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는 내 마음이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거대한 상실에 대한 어쭙잖은 위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글쎄, 그럴지도. 그러나 그렇다고 인정하기에는 내가 쓴 상실의 목록에 오른 이름들은, 여전히 내 안에 생생하다. 그 이름들이 나의 우주와 교차한 모든 기점들에서 지었던 표정들이, 이내 곧 상실된다는 존재의 필연적인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내디딘 발걸음들이, 그 무상한 몸짓들이. 오늘 나의 표정에, 발걸음에, 몸짓에, 영원의 시간을 건너 선명한 인장으로 남아있다. 나 또한 누군가의 우주에서 그렇게 상실되고, 또 영원히 살아가겠지. 나 자신 또한 나의 우주에서 매일 상실되고, 또 영원의 시간 동안 선명히 새겨져 있다. 어제의 나와 이별한다. 거울 속의 지금의 나를 바라본다. 상실을 겪었던 수많은 ‘나’들이 가득 새겨진 눈을 들여다본다. 어제와 이별하며 오늘을 향해 나아간다. 상실과 영원의 목록이 내가 나를 잃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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