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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월 Jul 10. 2021

조명 바꾼 날

조명 [照明]
(기본 의미) 빛으로 밝게 비춤. 또는 그 빛.
[연극] 무대 효과나 촬영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광선을 비춤. 또는 그 빛.
어떤 대상을 일정한 관점에 비추어 살펴봄.



이삿짐을 웬만큼 정리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초록이를 들이는 것(텀을 두고 한두 가지씩), 그다음은 집 조명을 새 것으로 다 바꾸는 것이었다.

이사를 앞두면 살던 집에선 다들 조명이 나가도 집구석 구석에 먼지가 앉아도 그냥 이사하는 날까지 대충 지내게 된다.

이 집은 현관, 거실, 주방, 화장실, 파우더룸 할 것 없이 모든 곳이 침침했다. 두세 개 꽂혀야 하는 형광등이 하나도 겨우 살아있는 모양새였다.

나는 온 집 안 불을 환하게 켜고 사는 타입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없는 곳에 불이 켜 있으면 무언가 새어나가는 듯한 기분에 꼬박꼬박 끈다. 하지만 필요할 때 켜야 하는 조명이, 어둠을 환히 밝혀야만 하는 장소의 등이 침침하면 기분까지 어두워진다. 가난해지는 느낌이 든다. 물론 무드등은 좋아하지만 용도가 다르다.


집에서 제일 높은 의자를 들고 방방마다 다니며 조명 커버를 벗겨야 했다. 어떤 등을 주문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

장소마다  전등 커버가 모두 제각각 다른 모양. 즉 커버 벗기는 방법이 다 달랐다. 전에 살던 아파트와 같은 방식은 주방등뿐.


난감했다. 끙끙대며 이렇게 저렇게 팔 뻗어 애를 쓰다 보니 땀범벅에 짜증이 났다.

이 밤중에 관리실에 도움 요청할 수도 없고, 마음먹고 땀 흘렸을 때 해치우고 싶은 조바심은 컸다.

가장 처음 떠오른 건 역시 만만한 온라인 카페.

아파트 이름과 조명에 관한 단어를 넣어 검색하니 네 개의 결과물이 나왔다.

그중 단 하나만이 나와 같은 질문의 답이었는데, 바로 안방의 형광등 커버 여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었다.

그거라도 알고 나니 다시 일할 의지가 생겼다.


둥그런 커버의 윗부분을 한 바퀴 더듬더듬 거리니 설명대로 작은 플라스틱 나사 같은 것이 볼록, 그것을 돌려서 커버를 잡아당겼다. 먼지와 함께 커버가 시원하게 벗겨졌다.

하나를 해결하니 의욕이 생겨서 다른 것들은 요리조리 응용을 해보았다. 알고 있는 커버 종류를 총동원해서. 결국 현관 센서등 커버까지 모두 벗기는데 성공!


종류별로 주문해야 하는 조명이 모두 21개!

크기와 색을 꼼꼼히 비교해서  온라인 쇼핑몰에 주문을 했다.

그리고 주문한 상점에 따라 하루에서 삼일까지 배송된 등을 다시 장갑 끼고 의자를 끌고 다니며 교체했다.

작은 내 키로는 의자 위에서도 까치발을 하여 몸을 길쭉이 늘리고도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팔까지 뻗어  힘들게 갈아야 했다.


그래도 교체하고 나서 스위치를 켰을 때의 그 쾌감!  그 환한 빛!

기분까지 환해졌다. 수고를 할 만했다.

집 안 구석까지 눈부신 환한 기운이 스몄다.


나는 자취생활을 길게 해서 이사도 많이 다녔는데, 보증금에 맞추느라 꼭 내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할 수는 없었다.  집이 크고 작고 낡고 새것이고를 떠나서 애초에 세를 주려고 지어놓은 집의 경우 형광등을 너무 아껴 달아 놓은 곳이 많았다. 뭐 다른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후죽순 생겨난 원룸들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살았던 조금 더 저렴한 단독주택, 빌라 등의 작은 셋방들은 주로 그러했다. 때문에  이사하자마자 형광등부터 새것으로 갈아 끼워도 조명을 한 두 겹 덮어놓은 듯 어두침침했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당시의 내 풍족하지 못한 사정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너무 싫었다.

공간 구석으로 퍼지는 가난한 빛.


온 집안 새하얀 빛이 쏟아지는 것처럼 밝은 조명을 달아 놓고 , 실제로는 꼭 필요한 곳만 켜고 산다.

현재 내가 머무는 공간만.

침실은 따뜻한 색의 수면등만 켜놓고 산다.

그럴 거면 뭐하러 까치발 들며 수고했냐고?

글쎄 나도 모르겠다. 새하얀 빛의 조명은 눈부시게 새하얘야 하고, 소심한 반경으로 은은하게 비추는 주황빛 조명은 딱 그만큼만 밝아야 하는 것.

가난한 날의 내 공간에 대한 트라우마?

그냥 취향, 성격이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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