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망
숲에서 고독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 그 책의 저자들이 모두 남성이라는 사실을 너무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 침낭 하나에 의지해 잠드는 밤의 충만이나, 종일 걸어도 사람 하나 마주치지 않는 숲길의 고요, 원시적 낭만으로 가득한 탐험의 즐거움을 희석시키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언제나 책을 덮고 나면 마음 밑바닥에 늘 주파수가 덜 맞은 라디오처럼 잡음 하나가 희미하게 흐르고 있다. 이 오래되고 복잡한 소음의 이름 중 하나는 질투다.
<중략>
궁금하다. 한밤중에 택시를 타거나 어두운 집 앞 골목을 걸을 때, 에어컨 설치나 싱크대 수리를 위해 집에 사람을 불러야 할 때, 내 주위 남자들도 나처럼 의심과 두려움을 느낄까? 혼자 산길을 걷거나 하룻밤 숲에서 밤을 보내는 데 자신의 안위를 걸까? 책 속에서 침낭이나 텐트, 부싯돌 혹은 하루치 사유의 질문들을 안고 숲으로 떠나는 남자들은 딱히 더 용감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위축도 없이 산뜻하고 홀가분하게 숲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수컷 외뿔고래다. 암컷에게는 없는 외뿔을 지닌 그들은 알까? 약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성별이 문법 규칙에서 소외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나고 자라는 일이 무엇인지.
-월간채널예스 3월호 칼럼 무루가 읽은 그림책 중-
맞다.
질투다!
나도 그것에 대한 질투가 굉장히 강하다.
그까짓 것 핑계라고?
성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그것도 맞다.
대신 이렇게 말하겠다.
불쾌하고 끔찍하고 공포스럽고 수치스러웠던 경험이 없는 사람.
그것에 관해 어떤 트라우마나 상상력이 동원되지 않는 사람을 부러워한다고.
한 술 더 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하고 또 비슷하거나 더욱 심한 일을 겪을 각오를 하고라도 저 작은 소망을 이루겠다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존경한다.
우거진 숲,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아니 달 뿐이어도 좋다), 침낭 속에 누워있는 나, 단출한 배낭 하나.
물줄기가 멀지 않은 숲 속 낮은 지붕의 집과 텃밭.
내 소망을 얘기했을 때 빈 말이라도 '그렇게 살면 되지.'라고 말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 자신 포함.
"어우, 난 무서워. 싫어."
그 대상은 나와 같을 때도 있지만, 벌레나 귀신, 난방문제(경험을 얘기하며) 같은 것들도 나열된다.
나는 지금도 무섭다.
이십여 년동안 비슷한 일이 없었음에도.
새벽 출근길, 새로 뚫린 노선의 깨끗하고 환한 전동차 안에서 내 옆자리의 중학생은 교복 바지 바깥으로 제 성기를 꺼내 쥐고 있었다.
어느 아침엔 강남역에 내려 회사 방면 출구로 걷는데 마침 듣고 있던 MP3 플레이어가 끊겼다.
동시에 바로 뒤에서 열을 맞춘 듯 걷던 말끔한 신사의 동굴 울림 같은 목소리가 쳐들어왔는데, 나는 그때 너무 어리숙해서 얼음 상태로 걸음을 멈추었다가 그가 내 곁을 스침과 동시에 반대편 기둥 쪽으로 바삐 건너갔다. (뛰지도 못했다.)
그는 폴더폰을 귀에 대고 통화를 하는 척 떠들었는데 그 통화내용이 나를 겨냥한 음담패설이었다.
음담패설?
아니, 이 표현은 너무 순하다. 나는 그때 그가 말하는 내용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입에서 튀어나온 신체기관을 지칭하는 비속어에 경기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바쁜듯한 걸음걸이, 굵은 목소리, 날리던 코트자락, 검은색 서류가방이 또렷하다.
신체에 손을 슬쩍 가져다 댄다거나 하는 일이야 예를 들기도 입 아프다.
내 가방 안에는 치한 퇴치용 스프레이도 있었다.
그건 정말 저런 경우에 아무 쓸모도 없었다. 내가 당했다는 것을 마치 모르는 것처럼 도망가기 바빴다.
지금도 나는 환한 대낮 텅 빈 골목보다 저만큼 마주 오는 단 한 사람이 무섭다.
나는 단지 질투가 난다고 말할 뿐이다.
성별 상관없이 쓰레기 짓을 한다는 것, 당한다는 것 너무 잘 안다.
나와 같은 공포가 아니어도 다른 류의 트라우마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글에 함부로 올릴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도.
서로 상대가 일반화를 시킨다며 둘로 나뉘어 싸우는 걸 꽤 보았다.
가장 화나고 답답했던 건(대부분 그럴 테지만) 공감하거나 이해하려는 짬도 없이 공격하거나 우스운 농담거리로 넘기는 거였다.
경험을 적으며 마무리해야겠다.
상쾌한 초여름 아침 출근길에 동네 주택 공사하는 인부 두 사람에게 말로 희롱을 당했을 때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손에 믹스 커피 향이 진동하는 종이컵을 든 그들은 전철역을 향해 바쁘게 걷는 나를 발견하고는 친히 길을 건너왔었다.
그 일을 당시 남자친구에게 전해 들었던 커플 모임의 한 오빠가 치한 퇴치용 스프레이를 구해다 준 것이었다. 나만큼 분한 모습을 표현해 주길 기대했던 남자친구는 웃고 말았는데, 그 오빠 커플은 정색을 하고 다른 출근길은 없는지 등의 걱정을 해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욕을 한 바가지 퍼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늦은 밤의 모임이었고 야외 테이블이었는데 테이블 밑으로 사용법을 알려주다가 조금 분사가 됐다.
적은 양이라 그런지 아무렇지 않기에 가방에 넣었는데 갑자기 조금 떨어져 있던 테이블에서 소란이 일었다.
바람 탓이었다.
서너 명의 남자들이 콜록거렸고 급기야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냐고 소리쳤다.
당황한 우리 중 나를 포함한 몇이 일어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머리 숙여 죄송합니다, 거듭 사과했다.
기침이 멎은 남자들은 립스틱만 한 치한 퇴치용 스프레이의 깜찍한 크기를 보고 웃었다.
그러더니 기어이 밤공기를 가르고 한마디가 날아왔다.
"그쪽 여자들 얼굴 보니까 치한 걱정 안 해도 되겠는데, 뭘."
언니는 인상이 변한 오빠의 팔짱을 꼭 끼고 놓지 않았다.
#손바닥안의반딧불이가그리워진밤#소망은계속된다#고로질투도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