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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끼리새 Feb 15. 2023

4.5km만큼의 생각

러닝으로 하루 마무리하기

밤공기를 마시며 호수공원을 한 바퀴 달렸다. 팔동작과 스텝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가쁜 숨이 천천히 진정될 때부터 몸은 마치 태엽을 잔뜩 감아놓은 장난감처럼 저절로 움직였다. 안정적인 궤도에 안착한 듯 육신은 쉬지 않고 달렸고 영혼은 비로소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밤 열 한시 4.5km를 달렸고 그 길이만큼의 생각을 뽑아낼 수 있었다. 트랙을 따라 길게 늘어진 생각은 노폐물일 때도 있었고 다시 주워 담을 만한 기발한 아이디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새 없는 내 몸은 굽이치는 트랙을 따라 왼편에 호수를 두고 계속해서 달렸다. 전방을 향한 몸의 관성은 생각에도 전이됐다. 반면 낮 동안의 생각은 주로 멈칫하거나 다른 생각의 침범을 받을 때가 잦았다. 출처가 불명확한 생각들이 나의 멀티태스킹의 가능 여부를 묻지 않으며 괴롭혔고 과부하된 생각주머니는 뛸 때야 비로소 시원하게 식었다.


생각의 길이가 2km를 돌파하는 구간에 팔각정 형태의 정자가 있다. 그 옆을 지날 때 아침부터 시작된 하루 일과를 떠올려봤다. 12시간이 넘는 과정이 1분도 되지 않아 정리된 것으로 보아 특별히 인상적인 사건이 없었나 보다. 그래서 팔각정을 통과하면서부터 오늘 하루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책에 밑줄을 긋거나 귀퉁이를 접는 부분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특별함 없는 일과였어도 특정 부분을 강조하는 건 지극히 사적이고 자유로운 일이다. 책에 그어진 밑줄을 보고 그 누구도 왜 중요하지도 않은 곳에 표시를 해두었냐고 묻지 않는다.


한참 트랙을 달리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타났다. 나무로 된 다리를 건널 때는 뛰기 어려워 호수를 내려다보며 걸었다. 고민 끝에 하루 중 점심을 먹었던 순간에 동그라미를 쳤다. 샐러드를 먹었기 때문이다. 빵을 먹고 싶은 욕구를 누르고 배달 음식을 시키고 싶은 나태함을 극복하며 냉장고에서 야채를 꺼내 씻어 물기를 제거하는 정성이 더해져 완성된 샐러드였다. 팔각정을 지날 때쯤, '점심 끼니=샐러드'는 1초 만에 스쳐간 별 볼 일 없는 일과였지만 4km만큼의 땀과 생각을 뽑아내자 스스로를 컨트롤했던 건강한 하루를 완성할 수 있었다. 나무다리를 건넌 후 몸은 남은 500m를 소화해 냈고 머리는 싱그러웠던 하루를 음미하며 내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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