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일력 3/8

슈크림 라테, 설악산 눈

by Julie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
많은 암흑 횡행할지나
다른 날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

나혜석 <인형의 가>


처음 오늘의 문장을 봤을 때 든 생각.

?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검색해 보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료를 정리해 둔 멋진 사람들의 기록이 나온다.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137_0040


묘했던 위의 문장은 나혜석 본인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1921년 [매일신보] 신문에 희곡 <인형의 집>이 연재되었는데, 나혜석은 화가로서 삽화를 맡았다. 마지막 회에 희곡 내용을 다룬 노래를 만들어 실었고, 나혜석은 그 노래의 가사를 지었는데, 오늘의 문장에 나온 게 바로 그 노랫말이다. 그러니까 위의 문장은 희곡 <인형의 집> OST의 가사라는 것.


<인형의 집>은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1879년에 발표한 희곡이다. 1879년 12월 21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초연되었고, 한국에서는 1925년 조선 배우 학교에서 처음 공연되었다고 한다.

주인공 ‘노라’가 아버지의 딸, 남편의 아내, 아이들의 엄마라는 정체성 안에서 살아가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야기다. 제목인 ‘인형의 집’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노라는 그동안의 자신의 삶이 주체성이 없는 인형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신여성 나혜석이 삽화를 그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인형의 집>


오늘의 문장을 처음 봤을 땐, 소녀들을 유혹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국사 편찬 위원회의 해설을 읽고 나니 달리 보인다.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가 그동안 자신이 남자들의 인형으로 살아왔음을 깨닫고, 자신과 같은 수많은 여성들에게 변화하자고 독려하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사랑하는 소녀들아’라는 말은 같은 처지의 여성들에게 보내는 동지애다. 변화가 폭풍우처럼 무섭고 힘들겠지만, 그 시기를 지나면 주체적인 나 자신으로 살게 된다는 응원이었다. <인형의 집>을 쓴 헨리크 입센은 남성이다. 그 시대에 남자로 살며 누리는 이점이 많았을 텐데,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이 작품은 엄청난 화제 속에 파장을 일으켰고, 자유를 원하는 여성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여기까지 조사하는 동안 반성했다. 나보다 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이 트여있었는데, 현대를 살고 있는 나는 어째서 그렇게 사소한 일들로만 고민하고 있었을까!






나혜석이라는 인물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지만, ‘신여성’ 그리고 ‘화가’라는 정도밖에는 알고 있지 못해서 찾아봤다. 1896년에 태어나 1948년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시대배경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운 인생을 살았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가고, 자유연애 후 결혼을 했다. 남편 직장에서 받은 포상휴가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세계여행을 한 뒤에, 자신은 프랑스 파리에서, 남편은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도 한다. 2026년의 일이라고 생각해도 대단한 인생이다.


‘신여성’이라고 불리는 데는, 개방적인 사고방식이 한몫을 한다. 또래 친구들이 집안에서 정해 준 남자와 어릴 때 결혼하는 시대였는데, 나혜석은 연애도 여러 번 하고, 자신이 선택한 남자와 결혼한다. 게다가 바람까지 피운다. 열정적인 성격이 예술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사생활에는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이혼하고 말년에는 자식들에게도 외면을 받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으며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폴란드의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다. 나혜석보다 2살 동생이다. 변호사인 남편과 결혼하며 화가로서 활동폭을 넓히고,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지금 서울 코엑스에서 렘피카의 삶을 다룬 뮤지컬이 공연 중이다. 렘피카의 작품 중 <아름다운 라파엘라>라는 그림이 있는데, 이는 파리에서 생활할 때 만난 동성 연인 라파엘라를 그린 것이다. 남편과 딸이 있던 중에 바람을 피운 것이다. 뮤지컬 <렘피카>에서는 ‘렘피카’와 ‘라파엘라’가 주연으로 등장한다. 화가 렘피카의 인생을 이 둘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려 나간다.





아침에 설악산을 보니 하얗게 눈 내린 풍경이 멋지다. 조만간 아침 일찍 눈 보러 델피노에 가야겠다 녹기 전에.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슈크림라테가 나왔다. 봄이구나. 10년 전에는 봄 하면 체리블라썸 라테였는데, 이제는 슈크림라테다. 솔직히 체리블라썸 라테는 맛이 없었다.


곧 진짜 체리블라썸이 올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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