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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 미 Nov 15. 2019

꽤 괜찮은 어른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지랖을 고백합니다"의 글을 쓰는 동안 내내 괴롭혀 온 문제는 딱 하나였다. 서툴러도 괜찮고 처음이니까 괜찮은데, 그래서 언제쯤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느냐는 것. 그러나 연재를 하다 말고 무책임하게 접고 난 뒤 좋은 어른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로 깜박이는 커서를 쳐다보고 있던 어느 날 밤,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연재를 앞둔 시점이었고 한 편 정도, 좋은 어른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휩싸인 채로 더 끌고 갈 수 없어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한 때였다. 고모할머니의 부고 소식.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밤에 오는 전화는 좋은 소식이 없다고. 


    몇 글자도 제대로 못 적던 날이 하루도 아니고 며칠 동안 이어지고 있던 날이었다. 달력은 9월인데, 날은 아직 덥고 써지지 않는 글은 애꿎은 날씨 탓으로 돌렸다. 더워서 에어컨을 틀면 추워지고, 추워서 끄면 더워서 투정 부리며 여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림 한 장을 그려두고 학창 시절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더웠었나' 하는 생각이었는데. 그림 한 장에 붙은 글은 방학 때마다 가던 고모할머니 집의 기억이었다. 

중학교 방학 때까지 매년 방학을 고모할머니 집에서 보냈다. 우리 남매가 늘 그곳에 가자고 했으니까. 아빠는 고향에 가면서 김천 고모할머니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에서 내려 김천 시내에 접어들어 감천이라는 긴 강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면 골목 어귀부터 한약재 냄새가 났다. 곧 할머니 집에 도착한다. 

    아빠의 고모이고, 나의 친할아버지의 여동생이자 나에게 고모할머니이면서 엄마에게는 친정엄마보다도 가까웠던 사람. 

오랜만에 그림 한 장 그리고 고모할머니의 집 기억을 떠올리며 몇 자 적은 그 날 그리고 정확히 이틀 뒤였다.


    아빠를 통해 고모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전화를 끊자마자 펑펑 울고야 말았다. 밤새 할머니 집으로 가는 꿈을 꿨다. 고등학생이 되고 친인척들로부터 멀어져,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허세 잡게 되는 때부터 고모할머니 집에 가지 않았다. 한 번은 집에 있기 싫은 방학이라 무작정 고모할머니 집에 간 적은 있었다. 가족들도 없이 달랑 혼자 말이다. 기억나지 않지만 가출이었던 것 같다. 근데 간다는 곳이 고모할머니 집이었다. 돈이 없었으니 숙박을 잡을 수도 없었고 하는 수 없이 밥도 주고 재워도 주는 지방 저 어딘가에 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작정 갈 만큼 가까웠던 것 같은데, 아니 가까웠다고 쓰려니 더 마음이 아린다. 이렇게 전화 한 통으로 부고 소식을 들을 만큼 황망한 관계가 되어 있었다.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는 이미 목소리가 잠길대로 잠겨 밤새 울 기세였다. 고모할머니가 아파서 서울에 있는 병원에 온다고 했을 때 왜 가보지 못했을까. 저번 주에 벌초 간다고 하셨을 때 돈만 부칠 것이 아니라 다녀올 걸. 하면서 후회와 회한이 겹겹이 층층이 엄마를 슬픔에 잠기고 하고 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오래전에 돌아가신 친정엄마와도 같은 분이 고모할머니였는데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냐며 오열했다. 나에겐 방학의 추억이지만 엄마에겐 마음이었구나. 싶었다. 슬픔의 경중을 가를 순 없지만 우리는 모두 비통했다. 자궁암 말기인 사실을 알고 김천과 서울을 오가며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언제 얼굴을 본 게 마지막이더라.. 내 결혼식. 작년 11월에 본 얼굴이 전부구나. 

급하게 김천 내려가는 기차를 알아보는데, 더 절망스러웠다. 고작 1시간 30분이 안 걸리는 시간이었다. 


    장례식장으로 가기 위해 나서던 날, 비가 오고 있었다. 이제야 더위가 한풀 꺾이는 가을비였다. 기차표를 예매했고 남편이 함께 나섰지만 빗속으로 역까지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돌연 표를 취소하고 차를 끌고 집을 나섰다. 생각보다 일찍 나선 탓에 김천에 다른 가족들보다 먼저 도착했다. 도무지 장례식장으로 바로 갈 엄무가 나지 않아 남편에게 어렸을 때 기억에 남았던 직지사로 가자 청했다. 우리 어렸을 때는 어떤 종교를 믿는다기 보다는 무교라고 하면서 제를 지내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위해 굿을 했었다. 절에 갔고 불공을 드렸다. 그때의 기억으로 직지사로 간 것이었지만 절의 분위기가 좋아 여행 삼아 가본 적 외에 불공을 드려본 적이 없어 낯설기만 했다. 장례식장에 갈 수 없어 머뭇거리는 발걸음을, 아리고 슬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간 것이었다. 그 마저도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위해서였던 걸까.

불상 앞에 절을 하고 천천히 절을 걷는 동안 남편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엄마, 고모할머니와 왔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고 그때보다 삼십 년이 지나 훌쩍 자란 나무들 사이에 눈물을 쏟았다. 그래, 장례식장에서는 너무 많이 울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장 앞에 도착해서도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언제 오지, 동생네는 어디쯤 왔을까. 그렇게 로비에서 작은 아버지네를 만났고 가족들이 오면 인사드리러 가겠다곤 소파에 눌러앉아 버렸다. 병원에선 고모할머니의 장례 하나만 치러지고 있었고 전광판에 고모할머니의 이름과 나이가 적혀있었다.

향년 68세. 

작은 아버지는 78이라고 적혀 있어도 많다고 생각이 안 되고 88세라고 적혀 있으면 또 모르는데, 68은 너무 적은 숫자가 아니냐고 하셨다. 그렇네. 적네. 

동생이 도착해 함께 절을 올리고 엄마, 아빠를 기다렸다. 엄마와 할머니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기 시작했다. 절을 하는 동안 영정사진의 고모할머니를 쳐다볼 수 없었고 엄마와 할머니의 눈물도 쳐다볼 수 없었다. 엄마의 슬픔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저 엄마 옆에서 물을 떠다 주고, 휴지를 챙겨주고 직지사에 갔다 온 이야기를 하고 주저리주저리 할 뿐. 


    예기치 못한 헤어짐 앞에서 소리 내어 울지 못한 것은 오늘뿐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갑작스럽게 사고로 돌아가신 할아버지 앞에서도 울지 못한 나는 어른들로부터 눈물도 없냐는 소리를 들었다. 눈물이 많은데, 텔레비전이든 영화관에서든 슬픈 장면이 안 나오길 바라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보기 일쑤인데. 정작 내 슬픔 앞에서 울지 못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린 시절 방학 때, 고모할머니 집에서 있었던 일을 두서없이 떠들면서 좋은 어른은, 어른다운 어른은 이럴 때 어떻게 하는지 정말 궁금해졌지만 슬픔 앞에 장사 없는 거 아닐까. 울음으로 슬픔을 떨궈내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는 하염없이 떠들면서 떨쳐내는 사람이 있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조용히 침묵할 수도 있겠다. 헤어짐은 아픈 일이고 그 아픔이 누구의 속에 들어앉느냐에 따라 사람은 아프고 슬픈 일에 자신의 모습대로 표현하겠지. 적어도 좋은 어른은,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괜찮은 어른은 아마도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울고 싶으면 울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표현하며 남에게 울어줄 수 있는 만큼 나에게도 울어 줄 수 있는 것. 울지 않는다고 슬프지 않은 것이 아니고 슬픈 일에만 눈물이 나는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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