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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미 Aug 22. 2019

문제는 나였다

취향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나는 사람들에게서 ‘센’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사람 혹은 거칠게 말하는 사람뿐 아니라 술 잘 마시는 사람, 자신의 주장이 분명한 사람 등의 여러 가지를 합쳐 ‘센’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 스스로만 나를 향해 센 사람이 아니라고 할 뿐 주변 모두는 나를 그렇게 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자존심이 세고 꼭 해야 하는 말이라고 느낀다면 말했고 음식 메뉴 하나 고르는 것에도 의견이 있었다. 지는 것을 싫어하고 모르는 것보단 아는 척하는 것에 급급하기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센’ 사람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취향이 확고한 사람일 뿐이다.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센 사람으로 불리던 나는 그동안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그 말들에 반기를 든다.


“너 예민하지. 까탈스럽잖아.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잖아.”

“아니야. 난 그저 내 취향, 내가 좋아하는 걸 말하는 것뿐인데, 그게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거야?” 


취향이 분명한 사람을 두고 ‘예민하다, 까탈스럽다, 까다롭다, 강파르다’와 같이 인식되는 점이 불편하다. 사람의 취향 자체가 한순간에 생겨나는 법이 없고,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자신이 좋아하는 향과 맛이 있고, 책을 한 권 골라 보더라도 하나 못해 좋아하는 장르 하나쯤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이 오늘내일해서 생긴 취향은 아니란 말이다.  취향이 자신에게서 남으로 번져 가는 상황들이 종종 생길 때,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잣대가 드리워진다.  

나는 그동안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 자신의 것이 있다는 점, 무엇보다 그 말이 정체성처럼 느껴졌다. 성격이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안목이나 센스가 까다롭다는 지점으로 이해했지만 시간이 지나 지금은 그것들이 전부 “예민한”성격으로 번져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나였다. 

취향이 확고한 사람에게 ‘예민하다, 까탈스럽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이 상대에게 보이는 방식과 같은 태도에 따라 ‘취향이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예민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가요?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가요? 



    사회에 나와서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그동안 살면서 받은 관계의 그림자도 있겠지만 자신과 말이 통하고 좋아하는 것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점에도 있다. 머리 크기 전 친구, 즉 초, 중고등학교 친구들이 오래 만나 별로 불편하지 않게 서로를 대할 수 있고 받아줄 수 있는 이유는 그때 우리는 함께라면 뭐든 재미있었던 기억 덕분이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환경은 변하고 너와 나의 세계도 변해가면서 성격을 떠나 한 사람의 습관, 태도 등이 변한다. 어린 시절 친구는 대부분 그러한 변화에서 조금은 동 떨어져 있는 세계에 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서 만나게 되는 낯선 누군가는 동갑 혹은 동기라는 이유만으로 가까워지긴 어렵다. 이때, 취향이라는 것이 관계를 가깝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직장을 이직하고 한동안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스타트업 기업이었고 삼십 대 중반의 직장 생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사회초년생인 직원들과 가까워지는 법이 낯설었고 전부 이십 대인 그들은 나에게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중 동갑인 한 녀석이 입사했다. 대표로부터 동갑이고 하니 잘 챙겨주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럴 겨를도 없이 나는 너무 바빴다. 기본이 부족한 회사에서 무언가 시스템을 생산해내고 구조를 바꾸는 시기 속에서 나는 내 몫을 충분보다는 더 많이 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사의 큰 프로젝트를 함께 하게 되면서 녀석과 업무적으로 가까워진 시기였다. 녀석은 나보다 금방 사람들과 어울렸고 나보다는 세대의 차이를 크게 느끼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우연한 술자리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는 서로가 술자리를 좋아하고 음악 듣기를 좋아하며 안주의 취향이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로는 기뻤다. 지난 회사들처럼 회식 문화가 있던 곳도 아니었고 ‘워라벨’을 원하는 직원들은 자신들의 저녁시간을 오롯이 혼자 또는 취향이 맞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종종 함께 술을 마셨다. 

    퇴사한 지금, 나는 녀석과 가끔 술을 마시는 친구가 되었다. 어떨 때는 가끔보다 더 자주 일 때도 있다. 함께 회사 생활을 한 것은 채 몇 개월이 되지 않지만 술자리에서 얼굴 맞대고 큰 소리를 내기도 하고 울기도 한 시간은 벌써 1년이 넘어가고 있다. 다른 것보다 녀석과 나는 그저 술 취향이 잘 맞는 사이다. 정말 사소한 것이었다. 사소하지만 안 맞을 수도 있는 술과 안주. 그 취향 만으로 우리는 우정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녀석이 음악을 들으러 가는 곳에 함께 갔다. 단골로 가는 집이다 보니 녀석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음악을 듣는 모습을 유심히 볼 기회가 종종 있었다. 나에게 음악은 때로는 정적을 감추기 위한 것이거나 기분을 달리하고 싶은 어느 순간들에 깔리는 BGM과도 같았다. 때문에 가사가 귀에 꽂혀 하루 종일 상념에 빠지게 하는 가요를 멀리 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의 좋아하는 음악을 주인장에게 신청하기도 했고 직접 자신들의 앨범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누군가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가수나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생경한 모습이었고 신청곡보다는 그들이 신청하는 곡이나 주인장의 추천 곡들을 들었다. 어느 누구도 ‘왜 이곡을 몰라’라는 반응은 좀체 있지 않았다. 당연히 모를 수 있지. 


    첫 직장에서 만난 아르바이트를 하던 녀석 중 나와 동갑내기가 있었다. 다른 아르바이트생 동생들이 그를 잘 따랐고 말수가 적은 녀석이었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한 동생 덕분에 함께 술자리를 하게 된 날 우연찮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아는 노래였다. 영화 ‘밴디트(Bandits)'에 수록된 곡으로 ‘Another sad song’이다.  대화 중에 크게 음악에 신경 쓰지 않는 나에게 그 곡이 귀에 들어온 이유는 감옥에서 만난 4명의 여성이 ‘밴디트’라는 밴드를 결성하고 탈옥하는 영화로, 자유에 대한 열망, 삶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이 음악이라는 점에 매료되었고 무엇보다 음악이 정말 좋았다. 97년에 나온 영화고 한국에는 99년에 개봉한 영화의 수록곡을 찾아 듣지 않고선  쉽게 들을 수 없었다. 때마침 나온 노래가 너무 반가워 이야기를 해보니 셋 다 이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셋은 서로가 이 음악을 알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처럼 느꼈다. 그 뒤로 동생 녀석을 종종 이야기를 한다. 그때 누나와 형이 그 영화와 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고. 





    문제는 나였다. 

나의 취향이 남들 누구에 비해 고상하지도, 그렇다고 특이하지도 않다. 취향이라는 자체가 위아래와 좌우를 가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부끄러운 일이다. 아마 그동안 나는 나의 취향이라는 것이 남들에 의해 또 스스로에 의해 조금은 특별하고 고상한 줄 알았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에이, 이 술은 이 음식이랑 먹어야지.’ ‘이거 먹어봐. 특별하다니까.’ ‘아직 이거 안 봤어?’ 등과 같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내가 경험하고 취향으로 삼은 기준을 상대의 취향은 등한시한 채로 대해왔다. 혹은 ‘당신이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 역시 쉽게 인정하지 않았던 나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문제는 나였다. 누구의 취향도, 취향 없음도 그리고 그와 상관없이 내 취향을 함께 공유하는 방식에도 나는 문제였다. 








    별별 오지랖이었던 것이다. 취향이라는 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말이다. 남의 취향이 뭔들, 나와 취향이 맞는다고 느끼면 그렇게 좋아라 하다가도, 어떻게 모든 게 맞을 수 있겠어 싶다가도, 그래도 자신의 취향 정도는 있어야 하지 하는 일관성 없던 태도. 

남편의 취향에 대한 고민이 참 많았는데, 오히려 나는 그의 취향 없음에 가까웠던 모습 때문에 연애에 이어 결혼까지 한 거 아닌가 돌이켜본다. 취향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확고하다 못해 고집스러운 취향에 대해선 반감이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 내가 그러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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