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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미 Aug 15. 2019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넘지 말아야 할 선에 대해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상처 받는 일이 너무 많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대부분은 감정인데, 그것들은 잘 표현되지 못해 항상 오해를 몰고 다니기 때문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여도 문제가 되는 녀석이다. 그렇다고 감정 자체를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리는 무릇 그 감정들을 잘 표현해 내야 하는 숙제를 매일, 매 순간 해나가고 있다. 때로는 빵점짜리 표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백점이 되기도 하는데 내 기억에 나는 백 점짜리 표현을 해 낸 적은 없는 것 같다. 끊임없이 문제를 풀어 숙제를 해 나가지만 좀체 나아지지 않는 것이 이렇듯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표현이다.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박사장은  운전기사로 기택을 고용하면서 자신은 선을 넘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을 한다. 그 장면은 영화 말미에 중요한 사건 발생의 시발이 되는데, 어느 정도 스포가 담겨 있어서 더는 언급하기 어렵지만, ‘선을 지킨다.’ ‘선을 넘지 않는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들 중 감정 외에 애매한 것은 이렇듯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이다. 가치관, 기준, 주관, 입장, 세계관 또는 예의, 주제 등등. 어떤 사람이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어떤 환경에서 이런 말을 쓰느냐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등장되는 ‘선’은 너와 나의 관계를 유지하는 무엇이 될 수도 있지만 너와 나의 관계를 파괴하는 중요한 마지노선쯤이 된다. 주제넘은 말 몇 마디쯤은 손쉽게 하는 나의 경솔함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 상대는 너는 선을 넘었다. 와 같은 방식으로 나와의 인연을 끊거나 하진 않았다. 물론 속상해했지만. 이러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주제를 넘는 것은 용서가 되지만 선을 넘는 건 용서가 되지 않는 더 굵고 단단한 무언가는 아닐까. 


    나의 주변은 또래보다는 대부분 나이가 한참 많거나 여하튼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종종 듣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인즉슨 너는 선을 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선을 넘지 않는 게 아니라 선을 넘을랑 말랑 하는 수준에서 잘도 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십 대 부터 쭉 들었던 그 말에 대해 이제야 생각해보건대 나는 과연 선을 넘지 않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던가? 그건 아닌 거 같다. 때로는 격한 언사를 가감 없이 하고 욕도 자주 할뿐더러, 아무리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가까워지고 서로 동의만 된다면 서슴없이 반말도 하는 사람인데. 이미 이 정도면 통념적으로, 선을 넘고도 남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선은 이러한 형식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어떤 표현의 일종으로서의 선이 아니다.

    

    오래전, 술자리에 우연찮게 합석한 지인의 일행들 중 한 사람과 시비가 붙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술이 건하게 취한 상태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여성에 대한 발언으로 오해(?)를 산 그는 술로 인해 용감해질 대로 용감해진 나의 가감 없는 질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사람들이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나의 폭주에 조용히 제동을 걸었다. ‘제발 딸과 아내 이야기만큼은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나의 이 정도 폭주라면 아마 상대의 딸과 아내의 불행함을 읊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찌 그걸 알았을지는 몰라도 나에게 그 말만큼은 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이성이 제 뿔에 꺾여 먼지처럼 사라지기 일보 직전의 일이었다. 나는 끝끝내 그와의 다툼 속에서 그 말만큼은 하지 못했다. 너희 가족이 불쌍하다는. 하지만 하고 싶은 말도 아니었다. 그러한 저주나 비난이 개싸움을 만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와 내가 싸우는 가운데 딱 하나, 일종의 룰이자 선이었다. 싸움은 길어졌고 그도 나도 점점 오르는 취기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싸움이 길어져도 지켜지는 선이 있다니. 나도 놀랍고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를 대단하다는 식이었는데 대단할 것도 없는 것이 뭣하러 그 사람의 부족함 덕에 주변 사람의 가여움까지 언급해야 할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여하튼 선은 그런 건가보다. 누군가의 치부, 혹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분노에 가까운 무언가. 어쩌면 건드리면 안 되는 상처 그 무엇이겠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 누구에게나 있는 듯한데, 나에게도 그러한 것이 있는 지 곱씹어보면 꽤나 많다. 재능이 없어 빌어먹고 살고 있는 나의 처지라던가 가족에 대한 험담이라든가 성희롱적인 제스처와 같은 것들 말이다. 생각해보니 꽤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 대해 누가 알겠는가. 스스로가 말하지 않고선 누구도 이 사실을 알 도리가 없다. 내가 선을 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건 그 사람을 살피기 때문이라는, 구체적일 수 없는 감각에 의존해 있는 점을 말해야 하는데 이건 참 표현하기가 어려운 구석이 있다. 대화 중에는 흐르는 공기가 있다. 술자리든 커피를 마시든 밥을 먹든,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해야 하는 숙제를 가지고 있지만 표현하지 않아도 그가 지금 대략 어떤 공기 속에서 숨을 쉬고 있는지 정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지레짐작이, 아마도 선 가까이에서 알짱거리다 마는 습관을 만들었다. 감각과 습관에 의존되어 있는 이 부분을 쉽게 풀자면 아마 눈치가 좀 있다 정도이지 않을까. 

반면 선을 넘는 일은 꽤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마 이러한 순간들이 때로는 오지랖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충언이 될 수도 있겠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할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해 마냥 덮어두고 괜찮다고만 하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는 아닐 거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해주는 사람이 지금 당장은 나를 위로해주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만다. 돌이켜보면 괜찮다고 해주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나의 감정을 툭툭 건드려 가며 선을 넘나들려는 용기를 지닌 사람도 반드시 필요하다. 인생은 괜찮다는 위로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사실 선을 넘는 것을 떠나서 우리는 때론 자신의 잘못이 들춰지는 일에 대해 불쾌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 역시 나만 알고 있는 나의 치부가 드러나게 되는 상황이 되거나 나를 위해서라는 걱정이라는 가면을 쓴 가시 돋친 말들에 대해선 쉽게 넘어가지지가 않는다. 마음은 알지만 굳이 그렇게 말을 해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불쑥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함께 넘을 선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 성장이라는 의미로 고민해봤으면 한다. 나 역시 절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고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싶지만 살면서 그 어떤 고통이나 상처를 넘어서 보겠다는 의지에 대해서 만큼은 정작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응원하고 싶다. 나에게도 누구에게도. 


그래야 우리, 조금씩이라도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나의 오지랖을 고백합니다’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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