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관계와 상관없이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내가 당신에게 보이는 관심과 때로는 주제넘는 말이나 행동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느낄까. 애정, 관심, 조언, 우정, 사랑, 혹은 선의.
그 어떤 감정으로 표현되든 간에 악의가 없다는 것이 동의된 것처럼 우리는 친구라 부르고 연인이라 하고, 가족이니까라고 하진 않았을까. 당신과 나의 관계는 어느 선까지를 선의로 받아 들 일 수 있을까. 친절이나 관심이 누군가에게 오지랖으로 둔갑하는 순간이 어디까지나 나의 선의와 무관하게 우리의 관계로만 규정된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여행을 다니면 여행지에서의 나는 이방인, 낯선 자, 낮술을 마구 먹을 수 있는 자를 비롯해 약자가 된다. 길도 모르고, 음식점도, 대충 이 도시에서 지낸다고는 하지만 의식주가 전부 일회용에 그치는, 돈이 없으면 더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약자. 그럴 때 여행지에서 누군가의 친절은 선의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단순한 친절일지 모르지만 의도를 알 수 없어 의심하게 된다.
감정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맬 때 나는 여행지에서의 약자와 같다. 요즘은 틈만 나면 그런 상태가 되는데 틈이 너무 많다.
서울시 자전거 ‘따릉이’를 타는 일이 종종 생겼다. 처음엔 저 초록색 자전거를 사람들이 헬맷도 없이 타고 다니는 것에 의아했지만 이내 그것이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공공자전거라는 걸 알았다. 꽤 오래전 파리에 갔을 때 ‘벨리브’라는 도시 공공 자전거를 보고 우리나라도 같은 시스템이 있으면 참 좋겠다 싶었던 적이 있었다. 시간 참 빨리 지난다. 그새 우리나라에도 공공자전거 시스템이 생겼으니 말이다. 여하튼 가끔 이용하지만 유용한 따릉이를 타기 위해 나간 날이었다. 사실 처음 이용하는 날이지만 처음 같이 보이고 싶지 않은 얄팍한 마음이 있었다. 대여권을 끊고 집 근처 정류장에서 자전거 하나를 아주 자연스럽게 뽑아 들고는 바구니에 가방을 실었다. 안장을 조절하고 앉아서 페달을 밟곤 깨달았다. 체인이 없는 고장 난 자전거라는 걸, 휘청거리며 자전거에서 내렸을 때 괜히 공공의 탓,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라고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여전히 나의 얄팍한 마음이란.
자전거에서 내려 앱을 통해 고장 자전거를 신고한 뒤 다른 자전거를 대여하려는 찰나, 마스크와 모자를 쓴 여자가 고장난 자전거의 안전키를 뽑으려 했다. '저거 고장 났는데 타보면 알겠지' 싶다가 “그거 자전거 고장 났어요.”라고 말을 건넸다. 이어폰을 끼고 있던 그녀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머쓱한 마음에 내 자전거나 신경 써야겠다 싶어 다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때서야 그녀는 “뭐라고요?”라고 나를 돌아다 봤는데 그 모습이 흡사 ‘뭐라는 거야?’라는 귀찮은 모습이었다. 머쓱하고 불쾌했지만 고장 난 자전거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알아 들었다는 듯 그녀는 다른 자전거를 대여해 나보다 먼저 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오지랖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던 날이다 보니 왠지 오지랖을 부린 사람처럼 느껴졌다. 운이 나쁘면 그 사람은 타자마자 넘어져 다쳤을지도 모를 일인데. 이런 순간이 종종 생긴다.
처음엔 나이 들어서 라고 생각했지만 나이 든 사람들이 주변에 보여주는 관심은 이보다 더한 경우가 많은 걸로 보았을 때 나는 그저 거절 혹은 ‘원치 않았다’라는 답에 대한 두려움인 듯하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안타깝게도 그 두려움의 크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몇 해 전 파리 판테온을 정신없이 둘러보는 동안 가방에 묶인 스카프가 떨어진지도 모르고 있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 곳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돌아보니 저 끝에서 내 스카프를 든 외국인 아저씨가 뛰어 오고 있었다. 성당까진 아니어도 위인들의 무덤인 이 곳에서 저리 뛰는 이유가 나의 스카프 때문이라니, 고맙고 미안했다. 런던에서 꼭 빨간 2층 버스를 타 보겠다며 타임브리지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도착도 전에 멈췄고 사람들이 다 내리는 바람에 어리둥절한 나를 향해 ‘이 버스는 여기서 멈추니 다음에 오는 버스를 타라’고 알려주며 처음에 샀던 티켓을 들고 그냥 타면 된다고 까지 알려준 청년도 있었다. 여행지에서 벌어진 곳곳의 친절은 내가 이 도시의 이방인이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안심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보거나 낯선 이에게 말을 건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내게 먼저 손 내 밀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이 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에선 좀 다르다. 여행은 여행이라는, 떠나온 사람이라는 특수성이 있어 예민하고 긴장한 상태이면서 어떤 일 하나하나에 여행적 의미 부여로 사소한 친절마저 사랑이 되어버리지만 서울에서의 나의 생활은 그와 반대로 지침과 힘겨움이 많은 것들에게 무던해지기 위해 애쓰고 쉽게 지나치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때론 일상의 지침으로 인해 날이 선 채로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산다는 것과 여행한다는 것의 차이가 그곳에 있다. 하루 종일 걸어 힘들었지만 여행인 상태는 의지할 곳을 찾거나 작은 말에도 위로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일상은 피곤한 시간들 속에서 숨거나 단절되고 싶어 진다. 그래서인지 여행에서의 친절은 대부분 선의로 받아들여지지만 일상에선 간섭 혹은 오지랖으로 둔갑되기 일쑤다. 낯선 사람일 수도록 사정없이 오지랖이 되어버린다.
남편에게 물었다. 왜 그럴까 하고.
남편의 대답은 의외였다, ‘오지랖인가 보지’, 아니면 ‘어차피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이니까’ 정도로 일축될 줄 알았던 그의 대답은,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라고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보인 선의가 그런 것이 아닌데 왜 그렇게 받아들이냐, 나는 그게 아니다.'라고 말하면 끝이라고?! 대답에 의아했지만 어쩌면 우리는 세밀하게 그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그저 내 마음이 선의였기 때문에 선의로 받아주기만을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받아줄 수 있는 관계라고 나 스스로 정의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깊게 생각한다고까지 말해준 남편 덕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