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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소리 Dec 10. 2020

너와의 거리두기

엄마만 잘하면 돼

  실은 반드시 해야 함을 알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나같이 게으른 사람은 식후 30분에 반드시 양치하는 것, 플라스틱 물병의 포장지를 벗겨서 분리수거하는 것, 젖은 수건은 마른 뒤에 세탁하는 것, 외출하고 돌아온 채로 침대에 눕지 않는 것 등이다. 머릿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부지런한 걸까. 게다가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간수하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 타인을 돌보는 일에서도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게 가능할까. 나조차 제때 양치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샤워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데, 이 모든 것을 제때 실천하는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 싶다. 아니면 모두 다 그렇게 행동하고 실천하는데, 나 혼자 더러운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양치와 샤워 외에도 제때제때 하지 않고 미뤄둔 일들이 산더미 같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생각나면 바로 실천해야 하는 성격이 아닌, 게으름뱅이 느림보라 머리에서 행동으로 옮겨가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이런 성향을 고치기 위해 일부러 몸을 움직이며 바쁘게 행동하려 하지만, 작은 일에서는 번번이 무너지기 일쑤이다. 차라리 식사 후에 바로 설거지하기, 빨래를 쌓아두지 않고 바로 하기, 아침에 일어나면 청소하기 등 움직임이 큰 행동들은 바로하는 편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고 나만 아는 행동에 있어서 늘 실패한다. 어쩌면 다른 사람과 연관된 일에 있어서 빠릿빠릿하는 것처럼 보여도, 정작 나 자신에게는 최대한 느긋하게 미뤄두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남의눈만 의식하는 것인가.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어디선가 읽게 된 글귀였는데, 나무도 서로 간의 적당한 간격이 있어야 잘 자라는데 사람들은 자꾸 그 간격을 허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무릎을 치며 공감했던가! 그런데 왜 나에게로 적용되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다. 나도 잘 안다. 사람 사이의 적당한 간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런데 그 문장이 나에게로 오면 자꾸 물과 기름처럼 동동 든 채로 내 곁을 돌아다닌다. 이 또한 나와 타인 사이에서는 아주 잘 지켜진다. 타인이 요구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그 거리를 유지하려고 든다. 문제는 가족, 특별히 자식과의 거리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두 아이가 어렸을 때, 나와 아이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화장실 가는 것, 씻는 것, 밥 먹는 것, 옷 입는 것 모두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소변을 가려줘야 하고, 밥을 떠먹야 줘야 하고, 옷을 입혀줘야 했다. 심지어 노는 것조차 아이 스스로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늘 옆에서 위험한 물건은 치워주고, 높은 곳에 올라가면 내려줘야 했다. 그것이 아이의 안전과 건강을 위하는 바람직한 양육자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아이가 자라면서 아이 혼자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다 나서서 해줬던 일들을 이젠 스스로 해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아이도 알고 있는 그때를 엄마인 나만 모르고 있었다.


  제대로 옷 입는 방법, 숟가락과 젓가락 잡는 법, 양치하는 방법과 세수하는 방법, 대소변 뒤의 뒤처리 방법 등을 잘 가르쳐주는 것이 내 일이었다. 아이가 대 여섯 살이 되면 제법 손의 근육과 뇌의 지능이 발달해서,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고 유도하고 기다려줘야 한다. 나도 이 모든 사실을 아주 잘 안다. 부지런하지 못한 나는 기다리는 일에도 젬병이다. 한 번이라도 느긋하게 아이의 행동을 기다려준 적이 없다. 머릿속으로 아주 잘 알고 있는, 이론적으로는 너무 빠삭한 이 일을 다시 한번 게으르게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꾸만 최선을 다해 아이를 재촉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게 뭐라고 이토록 최선을 다할 일인가.


  밥을 먹다가 좀 흘리면 어떤가, 숟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올리다가 떨어트리면 좀 어떤가. 제대로 옷을 잘 못 입어서 자꾸 갈아입게 되면 또 어떤가. 나는 왜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아이가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성취감을 박탈한 채, 아이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해 안달일까. 아이는 성장할 준비를 다 갖췄는데 정작 나만 그 준비가 안되었다. 제때 행동하지 못해서 몸이 더러워지면 늦더라도 씻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관계에 이끼와 곰팡이가 끼면 회복하는데 너무 오래 걸린다. 더욱이 부모와 자식 간에 온갖 더러움이 껴버리면 회복하는 일에만 한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 그 거리로 인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너무 미웠던 행동도 잘 보이지 않고, 가까이 있다면 쏟아져 나올 이야기들도 나오지 않는다. 적당한 거리는 내 눈도 가려주고, 내 입도 멈추게 한다. 조금 멀리 있으니 이전 같으면 마구 퍼부었을 잔소리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다. 그 마법 같은 일이 더 늦기 전에 '지금' '나'에게 필요하다. 나 같은 사람은 아는 것만 많아서 잔소리도 엄청 많다. 나는 그대로 행동할 줄 모르면서, 다른 사람에게 요구할 때가 정말 많다. 이 또한 알면서 고쳐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고 있다.


  육아를 하는 것은 양육자인 엄마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의 이름이 사라지고, 시간이 없어지고, 존재가 온전히 거름이 되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가 자랄수록 육아는 '내가 다시 자라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보고 싶지 않고, 고치고 싶지 않고, 적당히 미뤄두었던 내 모습을 다시 손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이 밀려온다. 다른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지만 육아를 당하는 당사자와 나만 아는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대로 다시 잘 자라나지 않으면, 육아를 당하는 선택권이 없는 아이들이 잘 자라나기 어려워진다.


  다른 것들은 다 미뤄두더라도, 아이와의 거리를 지키는 것은 반드시 해내야겠다. 한 번에 여러 가지를 해낼 수 없는 사람이니까 욕심내지 말고 '기다림'부터 부지런하게 지켜야겠다. 아이가 혼자 옷을 갈아입을 때, 한쪽 눈을 감고 묵묵히 기다렸다가 칭찬해줘야겠다. 아이가 혼자 밥을 먹을 때, 한쪽 눈을 감고 느긋하게 두었다가 잘 먹었다고 말해야겠다. 아이가 스스로 신발을 신을 때, 한쪽 눈을 감고 신발을 신고 나와 기다려야겠다. 나의 눈빛에 재촉이 너무 고스란히 묻어있으니까 반드시 눈을 감아야 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아이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아니라 느릿느릿한 행동이니까 반드시 눈을 감아야 한다.


  나와 아이 사이의 거리가 서로의 뿌리를 더욱 단단하게 자라게 할 테니, 한 번에 다 지킬 수 없더라도 하나씩 지켜가야겠다. 건강하게 잘 자라기 위해서, 더 오래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서로 간의 웃음이 쌓일 수 있도록 말이다. 남편의 말처럼, 조급한 마음은 체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지. 관계에서 조급한 마음이 생겨 체해버리면 소화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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