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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소리 Dec 29. 2020

오래된 관계

더 애정을 가지고, 진심을 담아

  오래된 것들에 대해 좋은 기억이 많다. 그래서 한 번 손에 감기는 물건을 만나면 아끼고 아껴서 흔한 말로 똥이 될 때까지 쓴다. 물건도 천년만년 쓰려고 아끼고, 사람도 천년만년 관계하려고 아낀다. 오래 만난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 예의를 담아서 최선을 다하려고 애쓴다.


  오래된 친구를 만나면 그 자체로 편안함이 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눈만 봐도, 단 한마디만 말해도 서로 알고 있는 역사가 있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서로의 성향을 너무 잘 알고, 가족사도 너무 뻔하게 알고 있어서 '아'하면 '어'할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다. 아무 생각 없이 마주 보고 밥만 먹어도, 금방 속마음을 쏟아낼 수 있는 관계인 것이다. 오래된 물건을 손에 잡고 익숙한 일들을 할 때의 성과처럼, 관계에도 오래된 깊이가 주는 진정성이 있다. "말 안 해도 알아,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돼."


  이러한 관계는 친구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무렵, 당시 초등학교 3-4학년이었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를 가르치는 것으로 우리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당시 공부방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아주 오랜 시간 함께 할 수 있었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공부방으로 달려와서 함께 저녁을 먹고 공부했다. 공부가 지치는 날은 함께 가까운 공원으로 나가서 배드민턴을 쳤다. 경찰과 도둑 게임을 하기도 하고, 내기를 해서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했다. 그렇게 4-5년을 함께 보내다 보니,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기분을 눈치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가족이나 친구도 아니고, 서로 세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애매하게 가까운 사이가 되어 갔다. 아이의 눈빛에서 깊은 한숨이 느껴질 때면 그녀를 따로 불러 삼겹살을 먹었다. 삼겹살을 구우며 "무슨 일이야?"라고 묻지 않고, "힘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냥 함께 마주 보고 밥을 먹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이만 나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었다. 관계란 참 일방적일 수 없는 것이었다. 내게도 아이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쌓여서,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얘를 알아."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믿음은 아이에게, 아이의 믿음은 내게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아이는 자라서 어엿한 성인이 되었고, 나는 결혼을 하고 아줌마가 되었다. 예전처럼 서로 자주 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고, 나름 각자의 생활이 있었다. 그렇게 일 년에 한두 번 안부를 물으며 살다가 훌쩍 필리핀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 곧 필리핀으로 갈 것 같아, 언제 다시 돌아오게 될지 모르겠어."라고 연락했고, 아이는 한달음에 서울에서 부산으로 나를 만나러 내려왔다.


  친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그녀의 발걸음이 반갑고 고마웠다. 고작 한 끼를 같이 먹자고 그 먼길을 주저하지 않고 내려와 준 그녀가 못 견디게 고마웠다. 삼겹살을 구워 먹었던 그 날처럼,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세세하게 하지 않았다. 이번엔 그녀가 내게 많은 것들을 묻지 않았고, 작은 위로도 입 밖으로 건네지 않았다. 그저 어제 만난 것처럼 낄낄거리며 밥을 먹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아직도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나와 그녀는 서로에게 더 가까워질 것을 요구하거나, 더 세세한 서로의 이야기를 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장 어렵고 차가운 시간에 서로의 곁을 지켜준다.


  그녀와 나의 서로에 대한 진심이 관계를 단단하게 메워주고 있다고 믿는다. 오래 함께한 시간이 허투루 흘러가지 않도록 서로에게 최선을 다한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이 망가져서 못쓰게 되지 않도록 아껴주는 것이 관계에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해서 멀어지지 않도록 서로 간의 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나와 상대의 최선이 만나서 관계가 진심이 되도록 이끈다. 오래된 관계일수록 더 세세하게 진심이 흘러가야 하니까 말이다. 나의 호기심으로 사랑하는 상대가 원치 않는 공개를 하지 않도록, 나의 무정함으로 그녀가 혼자 쌀쌀한 바람을 견디지 않도록, 진심을 다하는 것이다. 굳이 세세하게 개인의 생활을 이야기하거나 요구하지 않아도, 일상의 안부만으로도 충분한 관계가 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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