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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소리 Dec 18. 2020

실은 나도 걱정되어요

힘을 빼고 나니, 불쑥 속마음이 나왔어

  대학원에 다녔던 그 시절에 A형 간염에 걸려서 한 학기를 통째로 날린 적이 있다. 이미 등록금을 내고 반환받을 수 있는 시기가 지났던 터라, 교수님들을 찾아다니며 한 번만 봐주십사 사정했었다. 차라리 휴학을 하지 그러냐는 한 교수님 앞에서 우물쭈물 "학비 때문에..."라고 말씀드린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도 맹장수술, 유산으로 인한 소파수술, 제왕절개 등을 거치며 수술대에 여러 번 올라갔더랬다. 그렇게 아프기만 하니 돌보는 사람의 마음은 잘 알지 못했다.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어 밖을 지키고 있는 기분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동안 아픔과 치료를 담당했던 것은 나였기 때문이다. 아프고 치료받느라 정신이 없어서 주변을 살필 정신이 없었다. 사실 '아픈 사람을 돌봐주는 것이 주변 사람들, 가족들이 할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조금 정신이 차려지면, 곁을 지켜주는 사람에게 밥은 먹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뿐더러, 솔직히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돌봄의 주체는 나였으니까.


  올해 초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아이들의 병원 순례를 해야 했다. 그동안 미뤄뒀던 예방접종을 시작으로 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이 했다. 두 아이의 예방 접종과 영유아 검사가 끝나갈 무렵, 첫째 아이의 치과진료가 눈 앞으로 다가왔다. 어른도 힘들어하는 치과진료를 아이가 견딜 수 있을까 염려되었다. 그러나 아이의 어금니는 눈으로 보기에도 처참했다. 그동안 관리하지 못한 어미 책임이 컸다. 예민하고 겁이 많은 첫째의 성향을 잘 알기 때문에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어린이 치과를 예약했다. 그곳에서 눈으로만 확인한 치아 한대의 치료뿐만 아니라, 무려 여덟 대의 치아를 치료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치아 한 대씩 치료해보기로 마음먹었는데, 실상은 쉽지 않았다. 썩은 치아 부분을 긁어낼 때, 아이는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급기야 입을 제대로 벌리지 않고 혀가 다칠 것만 같은 위험한 순간이 자꾸 생겼다. 선생님은 더 이상 치료를 진행하지 못하셨다. 그리고 나와 남편에게 '진정치료'를 권하셨다.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진정치료를 예약하고, 아이와 함께 치과를 찾았다. 잠이 든 아이를 업고 진료대에 눕힌 뒤, 진료가 시작되었다. 진료가 시작된 뒤, 간간이 잠에서 깬 아이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이는 소리 지르며 울기를 반복했다. 심장이 무너지고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이 굼벵이처럼 흘렀다. 아이의 비명과 울음이 반복되다가 드디어 끝이 났다.


  그 날 처음으로 보호자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차라리 내가 저 자리에 있는 게 낫겠다는 부질없는 소망까지. 치료 도중 선생님의 부름으로 마취에 취해 누워있는 아이를 보러 갔었는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아이가 가만히 땀을 흠뻑 흘리며 누워 있었다. 완전한 수면상태는 아니어서, 아이는 내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비몽사몽 간에도 흐느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것이 미안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처절하게 무너뜨렸다. 아이는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잠만 잤다. 신경 치료를 함께 받은 터라, 씹어서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무엇이라도 먹어야겠기에, 그 정신에 한달음에 약 15분 거리의 빵집으로 뛰어갔다. 아이가 좋아했던 카스텔라 빵이라도 먹이고 싶었다.

 

  남편은 내게 그런 모습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그제야 엄마 같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 정도로 나는 평소에 감정이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소아병동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을 때, 소파나 침대에서 떨어져 상처가 생겼을 때도 크게 놀라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내심 '무슨 엄마가 저리 냉정하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치과에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눈물을 쏟는 나를 보며 '그래도 엄마이긴 하구나.' 했다고 한다. 정말 무정하고 무심한 남편 같으니라고.


  서른 후반,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는 이런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며칠 전 시아버지께서 몸이 불편하셔서 서울대학병원으로 검사를 받으러 다녀오셨더랬다. 이전에 같은 증상으로 병원 진료를 받은 적이 있으신데, 약을 처방해 주면서 다음번에는 보호자와 함께 오라고 당부하였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부랴부랴 서울대병원으로 진료예약을 잡았고, 남편에게 동행할 것을 당부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남편도 병원에 동행해서 QR코드와 갖가지 전산처리 등을 도와드렸다. 일흔이 훌쩍 넘으신 아버님이 혼자 해내시긴 벅찬 일들이었다고 했다. 그는 병원에서 겉옷을 벗고 검사를 받으러 가신 아버님의 옷가지를 찍어 보내왔다. 그 사진을 보자, 나는 첫째 아이 혼자 진료실에 둘 수밖에 없었던 그 날이 온몸으로 기억났다. 다시 몸이 파르르 떨리고 눈물이 툭 떨어졌다. 짐짓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답을 보냈다. "이런 거 보내지 마. 속상하잖아."


  가족의 아픔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간다. 이런 시간을 훌쩍 뛰어넘으면 안 되려나. 가족이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과정을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되려나. 대체 친정 엄마들은 어떻게 딸의 출산을 지켜본 것일까, 가족의 아픔에 동참하며 보호자가 된 수많은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제발 내게만은 이런 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자꾸 생긴다. 나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다. 온 힘을 다해 그런 척하는 것뿐이다. 아이의 아픔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어찌나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몸살이 날 정도였다. 아버님의 검사 결과를 들은 것도 아니고, 단지 검사하러 가시며 벗어둔 옷가지를 본 것만으로 눈물이 흘렀다.


  아픈 사람이 제일 힘든 법이니까, 나는 그 앞에서 힘든 척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일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람은 아파하는 사람이니까. 그 옆에서 걱정하며 앓는 소리를 해서 도움이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첫째 아이에게 "얼마나 걱정이 되었는지 알아? 이젠 아프면 안 돼. 알았지? 엄마는 너무 무서웠어."라고 벌컥 진심을 내뱉었다. 시부모님과 함께 식사하면서, "실은 제가 아버님 검사하러 가시는 날 한숨도 못 잤어요."라고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그게 참 부끄럽고 민망했는데, 이상하게도 감추고 싶었던 속내가 불쑥 드러나자 온기가 흘렀다. "엄마, 엄마가 그랬어? 정말? 엄마가 무서웠어?"라고 아이는 반색했고, "어머, 정말 네가 그랬니?"라고 어머니는 웃으셨다.


  실은 나도 너무 무섭고 떨리고 긴장되었다. 나의 내색이 아픈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냉정하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줘야 한다고, 그게 보호자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나는 참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너만 무서운 마음이 드는 게 아니다. 실은 나도 무섭고 떨린다. 하지만 괜찮을 거다.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다.'라는 진심의 힘을 몰랐다.  별 거 아닌 말 한마디, 치료제도 아닌 말 한마디가 무슨 힘이 있겠냐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의사가 아닌 나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진심 한마디 전하는 게 뭐가 어때서, 온몸에 힘을 준 채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몸에 힘을 빼야 부드럽게 넓은 소리가 나는 것처럼, 온몸과 마음에 힘을 빼야 진심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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