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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소리 Dec 17. 2020

서른일곱의 어리광

이마저도 그리울 그 날이 올 테니

  결혼을 하고 나면 나의 부모로부터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질 줄 알았다. 우선 사는 곳부터 분리되니까 엄마의 잔소리도 덜 듣게 될 테고, 간섭과 재촉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일은 경제적으로 홀로서기를 해야 된다는 의미인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그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혼한 뒤에 하는 독립은 진정한 홀로서기가 아니었다. 새로운 가족이 생기면서 진짜 독립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걸 몰랐다. 결혼하기 전에 자취생활을 하거나 하다못해 기숙사에 살아보기를 했어야 부모와 떨어져서 혼자 사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남들은 다 아는 것들을 왜 나는 이렇게 열 발자국 늦게 깨닫는 것일까. 어쨌든 '독립'이라는 나의 환상은 처절하게 깨질 수밖에 없었다.


  나의 아빠는 꽤 엄한 편이셨다. 대학 새내기 시절에도 통금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밤 8-9시만 넘으면 바로 엄마나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너 어디야? 언제 들어올 거야?"라고 물으셨다. 대학 축제가 있던 날, 나는 미친 척하고 엄마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나 오늘 집에 안 들어갈 거야." 그리고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선후배, 동기들과 함께 부어라 마셔라를 하던 때 엄마가 학교를 찾아오셨다. 나는 조용히 엄마 차에 끌려 들어가 집으로 갔다.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조용히 내게 "혹시 아빠가 군인이셔?"라고 묻곤 했다. 그래서 나는 자유를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은 경기도에 있었고 대학은 서울에 있었다. 그래서 통학시간이 약 한 시간 반 이상이 걸렸다. 통학시간만 아껴도 공부가 더 되겠다며 자취나 기숙사를 완곡하게 요청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조금 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될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독립에 대한 희망과 꿈은 더욱 커져갔지만, 부모님은 결혼만이 그 꿈의 완성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결국 그 꿈을 이뤄내고야 말았다. 스물여덟에 남편을 만나 그 해에 결혼을 했다.


  결혼하고 약 삼 년간 아이 없는 생활을 보냈다. 남편과 연애기간은 8개월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애하는 것처럼 함께 살았다. 그런데 자유롭게 연애하며 깨알 같은 신혼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잠시였다. 친정은 신혼집에서 두 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고, 시댁은 고작 오분 거리에 있었다. 더욱이 신혼집은 남편이 나고 자란 고향 동네에 있었다.  나는 낯설고 어려운 그 동네에 남편을 아는 사람이 천지였다. 길을 걸어가다 보면 남편과 인사하는 어른, 선후배, 친구들이 엄청 많았다. 자유와 독립의 기쁨도 잠시, 외로움과 서글픔에 빠지게 되었다. 익숙한 동네, 익숙한 사람들이 보고 싶어졌다. 급기야 나의 자유를 꿈꾸게 했던 부모님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친정 부모님께서는 신혼집에 몇 번 걸음 하지 않으셨다. 시댁 어른들과 가까이 사는 딸 집에 뭐하러 자주 가느냐고 타박하셨다. 그러던 중 삼 년 만에 드디어 첫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고, 친정 부모님이 바빠지기 시작하셨다. 손주를 보신 즐거움이 자녀를 키우는 것에 비할 수 없다고 하시며 온갖 출산 준비물을 장만해주셨다. 아이가 네 살이 되어갈 무렵, 우리 가정은 훌쩍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둘째 아이를 출산했다. 자녀의 출산은 서울과 부산의 먼 거리도 아랑곳하지 않게 되는 일이었다. 둘째를 임신하고 엄청난 출혈을 했더랬다. 유산 방지 주사를 수시로 맞으러 병원에 다녔고, 혹시라도 아이를 잃을까 노심초사하며 가만히 누워 지냈다. 그런 나를 안타까워하시며 하루가 멀다 하고 KTX를 타고 그 먼길을 내려오셨다.


  엄마의 도움을 받는 것이 자연스럽고 익숙해질 무렵, "아이고, 딸내미 AS가 끝이 없구먼." 나지막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결혼하고 독립을 했으면 몸만 떨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내가 낳은 자녀를 '엄마'가 된 내가 돌봐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 누군가의 자식이기도 하지만, 앞서 자녀를 낳아 책임을 져야 하는 부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독립은 실패했다. 일자리를 구해 출근을 하기 시작하면서 시부모님의 도움까지 구하게 되는 형편에 이르렀다. 이게 뭐람.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독립이 뭘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10-20대 때에는 그토록 하고 깊었던 독립이 결혼을 하고 나니 '제발 나 좀 신경 써줘'로 바뀌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하는 것일까. 주변을 돌아보면 양가의 도움 없이-도움을 구할 형편이 안되거나, 애초에 도움을 구하지 않고-척척 육아를 해내는 엄마들도 많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나의 성향인 것일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꾸만 부모님께 가까이하고 싶어 진다. 나의 자녀가 자라는 기쁨과 동시에 부모님의 나이 들어감이 확연히 눈에 보인다. 당당하고 힘이 세 보이던 아빠의 어깨는 사라진 지 오래이고, 주름 하나 없던 엄마의 얼굴과 손에는 검버섯이 자리 잡으려 든다. 나는 나이 먹는 걸 잊어도, 아이가 자라니 세월이 지나가는 게 실감이 난다. 아이 크는 것을 보느라 자꾸 부모님도 나이 드신다는 것을 잊게 된다. 문득 아이가 다 컸다고 느껴질 무렵, 부모님의 굽은 등이,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내가 대여섯 살 먹은 아이가 된 것처럼, 부모님께 어리광을 부린다. 그 날이 곧 내게 없는 날이 될까 봐 겁이 나서, 나는 자꾸 엄마의 막둥이로 돌아간다.


  애초에 내게 독립은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생애엔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아흔 살 되시는 부모님께서 일흔 살의 아들에게 "차 조심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일흔 살의 아들은 이미 할아버지셨다. 그분이 집 밖을 나설 때 차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아흔 살의 어미에게 일흔 살의 아들은 여전히 자식인 것이다. 그 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 나는 더 어리광을 부리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른일곱이나 먹어서 엄마와 아빠에게 온갖 어리광을 부린다. 내게는 자식을 키워 든든한 맛이 없다. 든든한 자식 노릇은 내 캐릭터가 아니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그저 평생 자식이고 싶다.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자꾸만 줄어들고 있어서, 세월이 너무 빠르게 지나서, 부모님 앞에서 내 나이는 거꾸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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