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의 좌우명

그냥

by 박아담

나는 유명인들이 진로에 대해 말할 때 당신이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으세요, 마음이 두근거리는 일을 찾으세요, 남들이 뭐래도 꿈을 꾸세요! 라고 말하는 게 정말 싫다. 사람은 다 자기 인생만 살아 봐서, 자신이 그 꿈을 이루었으니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자기 인생 하나밖에 모르면서. 무명한 아무개가 한마디 한다면, 아무거나 그냥 해라! 라고 말하고 싶다.

오랫동안 나의 정체를 나의 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절이 있다. 그 꿈 가까이도 못 간 채 포기하고 나서 와르르 무너졌다. (정말 반년을 천장만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지...) 재능이 없다는 걸 진작에 알았지만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그 꿈을 버리면 존재의 이유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10대에는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친구들 앞에서 뽕이 차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보니 오히려 꿈이 없던 친구들이 가장 '성실'히 그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때마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한 사람이 살면서 꿈을 이루는 게 자아실현의 최상위 성취라는 걸 나도 안다. 그리고 이제야 그 꿈을 이루는 방법도 안다. 그건 바로 그냥,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꿈을 이루려고 다른 '뭔가'를 하는 게 아니다. 꿈을 이룬 사람들을 보자면 이미 그 사람은 그걸 하고 있고, 심지어 꾸준히, 아주 오랫동안 하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이미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A인데 A를 하려고 B를 하고 있다면, 틀렸다. 그리고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룬 자들은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좋아서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것도 되게 꾸준히, 오래오래.

나는 오랫동안 연극 극작을 꿈꾸었다. 어릴 때부터 '무대'가 좋았다. 무대에 오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가 무대에 이야기를 올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극작과를 지망했고 극작과를 가기 위해서 카페 알바를 하며 과외를 받았다. 그 해 시험에 낙방하고 현장에서 배우겠다며 공연 스태프로 1년을 일했다. 그래도 내 이야기를 쓰려면 학교에 가야겠다 싶어 다시 1년을 콜센터에서 일을 하며 돈을 모으고, 다음 해 합격생을 '다수' 배출했다는 학원을 다녔다. 엔딩은 또 낙방. 이런 식으로 거듭 낙방을 하면서 20대를 거의 다 보내 버렸다. A를 하기 위해서 B를 하고, B를 하기 위해서 C를 하고, 결국에 Z까지 하면서.

내 꿈은 사실 그 대학이었던 것이다. 연극이 아니라. 대학에서 같은 꿈을 꾸는 동기들과 밤새 연극을 준비하며 연극에 대해 피 토하면서 얘기하고, 공연을 올리고, 그런 낭만을 꿈꿨던 것이다. 연극이 좋았으면 연극을 맨날 봤었겠지. 과외할 돈으로, 학원을 다닐 돈으로. 당시에는 돈이 없다며 궁색하게 구립 도서관에서 주구장창 희곡만 봤었는데, 이제 와 얘기하지만 진짜 재미없었다.

한 사람에 대해 그의 정체를 '대학'이나 '직업'으로 둔갑해 버리기도 한다. 나 또한 그랬다. 그게 꼭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대학이나 직업이 그가 살아온 '결과물'이니까 어느 정도 인정은 해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사회초년생이 회사에 입사조차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에도 정말 공감한다. 첫 직장이 곧 노력의 보상이자 현재 자신의 위치라 여기니, 조금이라도 낮으면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지망생'으로 남기를 택하는 마음, 누구보다 절실히 안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사회초년생이지 않는가. 첫 직장을 사회에 나가는 발판쯤으로 여기면 어떨까. 꿈이나 젊음 따위에도 먼지가 쌓인다. 검도 반짝반짝할 때 휘둘러야 뭐라도 벨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주어진 일을 '그냥' 하자. 뭘 베어야 할지 몰라도 된다. 그냥 현재를 살아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 이 글도 정말 '그냥' 쓰는 것이다. 그냥 뭐, 연재하기로 했으니까!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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