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

근데 이제 거기에 흑백요리사를 곁들인...

by 박아담

어언 10년 전 모든 꿈을 접고, 가까스로 취직한 회사에 마음 맞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아주 착하고, 야무진 친구였다. 그 친구와 점심시간에는 사무실 앞 놀이터, 골목 곳곳을 산책하고 퇴근 후 종종 호프집에서 오돌뼈에 맥주를 마셨다. 그 친구와의 시간은 미지의 심해에서 무지개와 같은 빛이었다. 여름은 정시퇴근을 해도 한낮이다. 그 친구와 또 오돌뼈에 맥주를 마시러 갔다. 한 주의 노곤함이 풀리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회사에 대한 불평불만, 가족사, 개인사 등 누가 더 불행한가 경연대회에 온 듯 신세한탄을 쏟아냈다. 나도 나지만, 그 친구도 그 친구였다. 치열한 경쟁이 오고 가는 와중에 한 뼘 간격도 되지 않는 옆 테이블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저씨가 홀로 노가리에 맥주, 야구였는지 축구였는지 스마트폰을 올려놓고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스포츠가 아닌 우리만 계속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아저씨가 합석이라도 하잘까봐 최대한 몸을 돌려 앉았다. (중간중간 핸드폰을 하는 척, 서로 카톡을 하며 옆에 보이냐며 왜 쳐다보냐며 변태 아니냐며 궁시렁댔다.) 생맥주를 얼마나 먹었을까. 한두 잔 비우다 보니 옆테이블 아저씨가 사라졌다. 다른 데를 가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다행이다, 하고 친구와 마음을 내려놓았다. 불행배틀은 어느새 칭찬배틀로 변질되어 언니가 더 낫네 네가 더 낫네, 하면서 깔깔거렸다. 그렇게 여름밤이 내려왔다. 주섬주섬 일어나 계산을 하려고 계산대에 다가갔는데, 옆테이블에 계시던 분이 계산을 하셨단다. 나와 동생은 그 작은 호프집에 다른 손님들이 다 놀라도록 소리를 질렀다. 네?!! 그 아저씨는 젊은 친구들이 고생이 많다고 하시면서 우리 테이블까지 계산을 하셨다고 한다. 그 야구인가 축구인가, 스포츠는 보지 않고 우리의 얘기를 다 듣고 계셨던 거다. 이상한 아저씨라고만 생각했던 게 얼마나 부끄럽던지. 친구와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면서 내내 반성했다. 감사한 마음보다 죄송한 마음이 컸다. 한편으로 우리 얘기가 누군가 듣기에도 어지간히 힘들어 보였구나 싶기도 했다.

최근 흑백요리사에서 백수저 최강록 셰프가 우승을 차지했다. 육퇴 후 남편과 흑백요리사 한 편 보는 게 그 시절 그 친구와의 오돌뼈에 맥주와 같은 것이었다. (요즘 다이어트 때문에 맥주를 끊었다. 복직이 코앞이라...)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최종화에서 감동을 먹어버렸다. 분명히 시즌1에서는 흑수저 셰프의 반란, 언더독의 우승, 이런 것이 시청자들의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는데, 시즌2는 어쩐지 보면 볼수록 백수저 셰프들에게 응원과 존경의 마음을 품게 했다. 사실 그 긴 세월, 묵묵히 한 길을 갈고닦아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온 백수저 셰프들은 우승이 아니면 오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고 도전하는 태도, 퇴직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다시금 열정이 불타올라 눈빛이 반짝이는 모습,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요리가 재밌다며 신이 난 눈빛, 이제 어딜 가나 '리더'의 위치인 사람들이 팀을 위해서 '팔로워'를 자처하는 모습들. 마지막 최강록 셰프의 나를 위한 음식으로 그들의 진짜 삶을 보여준 것까지. 경연이라는 쇼 프로그램에서 우승 상금이란 마땅한 것인데, 그게 다 무색했다. 흑백요리사 시즌1은 전국의 파인다이닝 열풍을 불러왔지만 시즌2는 유명하고 화려한 셰프가 아닌 기름 냄새와 땀냄새에 쩔어 그날 남은 음식으로 속을 달래는 전국의 자영업자를 보여주었다. 그것도 제작진의 의도라기보다 출연진들의 진심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결말이라 더 울림이 있었다.

자신의 업에 대한 프라이드가 남달라 상대가 누구라도 당찼던 요리괴물, 이하성 셰프의 면모도 빛났다. 자신보다 자신의 요리를 더 사랑해서, 자신의 요리에 대한 자신감으로 보였다. 그리고 최강록 셰프에 대한 선입견에 제대로 당했다. '지면 떨어진다.', '나야 들기름', '재도전해서 좋았다' 등 단순한 말을 대단하게 하는 재주, 어수룩해 보이는 특유의 화법, 떨리는 눈빛들. 그게 또 매력이지만 진짜 '어수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주 요물이시다. 스토리텔링, 서사가 기가 막히다. 제작진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세트장을 가상의 공간으로 만들고 퀘스트를 박살 내는 사실상 최종 보스인데 전국의 모든 자영업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반사시켜 겸손의 미덕까지 갖췄다. 진짜 똑똑한 사람이다.

자기 PR 시대에서 겸손이란, 구식에다 노잼의 신세가 돼 보이기도 했다. 그의 겸손은 동종업계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존경으로까지 나아갔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오래된 방식이 쉽게 노잼이 되기도 하지만 진짜 울림을 주기엔 또 그만한 것도 없다. 또, 어딜 가나 '리더십'만을 말하는데 더 중요한 건 '팔로우십'일 수도 있겠다. 사실 팔로우십을 더 오래 써먹지 않는가. 십 년 전, 그 오돌뼈 아저씨와 현재 최강록 셰프는 나의 선입견을 탁, 깨트렸다. 선입견이란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쌓이는 게 아니라, 하나씩 깨져서 유연해지는 게 아닐까?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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