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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4. 2021

0주. 시작을 여는 글

2019. 07. 06. by 감자

일요일을 쉬게 되자 한 주일을 살아가는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영화의 전당에서 ‘기생충’을 보고 강에 놓인 다리를 뚜벅뚜벅 건너던 5월의 일요일 늦은 오후, 작년까지 논술을 가르쳤던 고1 애 하나에게서 온 연락이 유독 반가웠던 이유도 여유로운 마음 덕분이었다.


"선생님ㅠㅠㅠㅠㅠㅠ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아세요?"


그 애는 학교 수행평가로 서평을 써야 하는데 도무지 감을 못 잡겠다고 투정이었고, 요즘은 시들해졌지만 한때 김연수 빠순이였기에 반가워하며 나 김연수 소설 안 읽은 거 없다고 아는 척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 책만은 읽지 않았던 것이다. 약간 머쓱해하며 그날의 연락은 대충 종료가 되었는데 그러고 나니 아무튼 그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소설책을 읽겠다는 마음이 든 것도 너무나 오랜만이었으니 이 역시 일요일의 휴식이 가져다준 여유 덕분인 셈이다.


공교로운 일은 계속되었다. 다음 주 어느 평일에 겨우 짬을 내어 도서관엘 갔더니 하필이면 그 책은 대출 중이지 않겠는가?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러 주변 서가를 둘러보았는데 여기서 세 번째의 공교로움이 등장한다. 바로 ‘대책 없이 해피엔딩’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김연수와 김중혁이 꽤 ‘핫’하던 시절 출간되었던 영화 잡담 에세이집…! 평소라면 읽을 마음이 1도 들지 않았겠으나 중첩된 공교로움과 나도 일주일에 하루는 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여유가 합체되어 나는 그 책을 빌리기로 마음먹었고, 첫 페이지부터 튀어나오는 10년 묵은 유우머들을 보며 굳은 얼굴로 ‘참 재미없군…’하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어째서인지 만정의 얼굴이 떠올랐고,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터졌던 것이다. 그래서, 곧장, 만정에게 연락을 하였고, 공교롭게도 만정은 베네치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터라, 격주로 찾아 올 마감을 즐거운 마음으로 수락했다는, 그런 결말이자 시작이다.


지금은 7월 6일. 토요일 수업을 칼같이 5시 45분에 마치고 우리 동네로 돌아와 커피숍에 앉아 만정에게 보낼 첫 번째 글을 쓰고 있다. 거의 50분 동안 쓰고 있는데 아직 써야 할 내용을 1도 쓰지 못하였고 마음이 조금 초조해지고 있다.


‘꼭 써야 할 게 있어? 그냥 손 가는 대로 쓰면 되는 거 아냐?’라고 만정은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맞다. 이 글은 어떤 강요도 쓰임도 없이 그저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이걸 출판해서 인세를 벌고 싶은 마음도 없고(물론 세상 일 어찌 될지는 모르니 절대 안 한다고는 하지 않도록 하자), 만정이 까칠한 영혼의 소유자라 ‘덜떨어진 글 따위를 보는 것으로 내 시간을 소비하지 않겠어!’라고 일갈하지도 않을 것이므로 나는 마음 편히 이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만정도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으려고 마음먹은 전적이 있는 사람이므로, 최소한의 틀이 강제되지 않으면 글을 쓴다는 것은 너무나 막막한 일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00번의 글(아마도 이쯤을 읽으며 맨 윗부분으로 시선을 올렸다 내렸을 것이다. 적혀 있죠, 00번?)은 우리의 글이 어떤 틀을 갖고 있으면 좋을지에 대한 제안서이다. 만정이 00번의 글을 읽고 다른 제안이 없다면 앞으로 우리의 주간 영화 글은 이와 같은 틀을 취할 수 있다면 좋겠다.


1. 서로가 주고받을 글의 주 소재는 영화로 한정한다.

2. 각 글의 주요 소재가 되는 영화는 중복될 수 있다.

3. 글의 분량은 A4지 두 장 내외로 잡는다. 우리는 둘 다 영화 평론가가 아니고 전문적인 리뷰어가 아니며, 또 서로 그저 좋을 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 글이 될 것이므로 너무 늘어지거나 또 너무 짧아지면 원하는 말을 적절하게 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글 근육은 그 이상의 글을 쓰면 근육통을 호소한다. 가볍고 산뜻하게 글을 끝맺기에 적절한 분량이라고 생각한다.

4. 마감은 매주 일요일로 정한다.

5. 각자의 마감일은 격주로 돌아온다.

6. 서로의 글은 하나의 한글 파일에 모은다. 즉, 다음 주까지 이 파일에다가 만정이 다음 글을 써 이으면 내가 그다음 글을 다음 페이지에 써 보낸다.

7. 이 글의 제목은 ‘일요일엔 영화를’... 이 어떨까 한다.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와 ‘주말의 명화’처럼 직관적인 제목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요즘이다.

8. 각 글은 순번으로 시작하여 다음 줄에는 글 쓰는 날짜를, 다음 줄에는 영화 제목과 감독, 한국 기준 상영 연도를 쓴다. 그리고 10줄을 띄운 뒤 본문을 쓴다.

9. 글자 포인트는 10, 줄 간격은 160%로 한다.

10. 이 글은 2019년 7월 7일에 시작하여 2020년 6월 28일에 마친다. 한 사람당 26편의 글을 써서 총 52편의 글이 쌓이게 되는 셈이다.

11. 10번을 제외하고 예외는 생길 수 있다.


여기까지 쓰는데 한 시간 20분이 걸렸다. 지금 시간은 20시 20분. 이제 본격적인 01번 글을 써야 하는데 조금 지쳤고 졸립고 술 마시며 음악이나 들으러 가고 싶어 졌다. 하지만 참겠다. 그리고 글을 쓰겠다. 아, 여유와 공교로움이 만들어 낸 번잡함이여! 번잡함이 가져다주는 충만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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