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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4. 2021

1.5주. '시작을 여는 글'에 대한
몇 가지 첨언

2019. 07. 07. by 만정

감자의 훌륭한 제안이 담긴 '시작을 여는 글'에 거의 이견이 없지만, 몇 가지 첨언과 바로잡을 부분 때문에 부득이하게 1.5라는 불완전한 번호가 끼어들게 되었음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먼저, 이 기획에 대해 최초로 제안받은 것은 피렌체-베네치아가 아니다-에서 이틀째를 보내던 점심 무렵이었다. 순조롭던 여행은 엄마의 몸살 기운이라는 작은 풍랑을 만났고 내 야심 찬 일정표의 몇 칸쯤도 ‘숙소’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날 오전 내 영혼은 우피치 미술관에서 잠시 정화되었으나 회사로부터 불의의 연락을 받으며 급격히 얼룩덜룩해졌다. 허겁지겁 숙소로 돌아와 잊고 있던 업무 뒤처리를 하다-업무는 별거 아니었다- 한바탕 눈물을 흘린 것도 이때쯤(휴가지에서 업무연락을 받는, 그것도 모자라 상사의 호의로운 도움을 받는 나 자신이 한심해서 참을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며칠 전 도착한 감자의 안부 메시지에 뒤늦게 회신했다. 거기 궁상이나 눈물의 흔적은 없었다. 감자는 고맙게도 곧장 답변을 보냈을 뿐 아니라 멋진 제안을 했는데, 이 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여행이 너무도 즐거운 나머지 아뿔싸!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라기보다는 '현실에서도, 심지어는 즐거움을 기대한 여행에서도 시련을 겪던 와중에 이 제안을 동아줄처럼 받아들였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다음으로,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아직 저술활동을 업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꿈을 폐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명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당연히 순전한 즐거움을 위해 작성되겠지만, 인세와 출판에 대해 한 줄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마지막으로, 감자가 제시한 구체적인 규칙을 보고 환호를 질렀다(규칙은 안정감을 준다). 단 하나, 10번을 제외하고. 10번을 읽는 순간, 나는 짧고 깊은 슬픔을 느꼈다. 이 일이 예기치 않은 시한부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시작하되 결코 끝을 생각하지 않는 관성의 사람이기 때문에 나온 반사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히 즐거운 일이라면 그 관성은 더더욱 구제불능이 된다. 게다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알 수 있는 일도 있다. 바로 이 일처럼. 이를테면, 남은 52주간 내게 최고의 즐거움이 되어줄 것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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