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아침부터 해야 할 일정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서 내가 먹을 자연식물식 반찬을 따로 만들만한 여유는 없었다. 다행히 미리 만들어 둔 자연식물식 음식이 있어서 세 끼를 모두 자연식물식으로 잘 해결했다(편안히 앉아서 여유롭게 맛을 음미하며 먹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때우듯이 먹었으니 해결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아침은 삼삼한 물김치 한 대접에 군고구마 한 개로 때웠다. 때웠다고 하기에는 채소도 넉넉히 섭취했고, 군고구마도 당도가 높아서 끈적끈적할 정도로 맛있었다. 점심과 저녁은 어제 만들어 둔 대파와 버섯, 두부를 넣고 끓인 된장국에, 지난 주말에 담근 배추김치를 개시해서 차렸다. 그리고 구이김에 멸치볶음, 채소무침까지 꺼내어 차리니 그럭저럭 구색이 맞았다. 자연식물식에 익숙해지고 나니, 가장 바쁜 날에도 가장 편한 음식이 자연식물식이다. 김치 종류는 미리 만들어 두면 꽤 오래 먹을 수 있고, 된장국도 한 냄비 가득 끓여 두면 며칠은 든든하다.
아이들이 먹을 반찬만 수육을 삶아 준비했다. 수육은 삶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손이 안가는 반찬 중에 하나이다. 냄비에 물을 넉넉히 붓고 적당히 해동된 수육용 돼지고기 한 근을 넣고, 월계수 잎 몇 장 추가해서 푹푹 끓이면 끝이다. 한 시간쯤 되었을 때, 젓가락으로 고기를 푹 찔러 보아서 핏물이 나오면 좀 더 삶고, 깨끗한 뽀얀 물이 올라오면 다 익은 거니 한 김 식혀서 자르면 된다. 삶는 중간에 물이 다 졸아 들었는지 확인하고, 물이 부족하면 더 부어주기만 하면 되니, 고기가 삶아지는 동안 충분히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리려 수육은 바쁜 날 만들기 좋은 음식이다.
지난 주말에 만든 김치를 드디어 개시했는데, 시원하고 개운하게 간이 잘 뱄다. 배추 한 포기와 무 한 개로 담갔는데, 김치를 담그려고 보니 굵은 소금이 똑 떨어져서 볶은 소금으로 절인 김치다. (가는) 볶은 소금으로 김치를 담그기는 처음이라 어쩔까 싶었는데, 평소의 김치보다 간이 좀 세게 느껴지는 것 말고는 별다를 게 없다. 고춧가루도 많이 넣지 않고 양념을 강하게 하지 않으니 넉넉히 먹기에도 좋고, 아이들도 좋아한다. 이전에는 인스턴트도 많이 먹었지만, 집밥을 해도 원팬요리로 묵직한 반찬을 주로 만들어서, 나중에라도 아이들이 내 반찬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를지 감이 안 잡혔는데, 이제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김치를 담가대고 있으니 아이들이 나중에 내 반찬을 생각하면 김치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먼 미래가 아니라도, 지금 당장 아이들이 삼삼한 김치를 맛있게 먹어주니 그게 참 좋다. 자연식물식 122일째다. 유연하게 운영하니, 조미김도 먹고 멸치볶음도 먹고 빵도 조금씩 먹는다. 자연식물식이 아닌 음식도 꽤 섭취하는 편이지만, 그러니 편안해서 자연식물식을 길게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