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진격해 올 짙은 어둠의 전조등처럼 저녁 회색빛 색조가 거리를 메웠다. 그 빛이 언제 시작됐는지 가늠할 수 없는 것처럼 방황의 시작도 그랬다.
주변이 느닷없이 어두워지고 세찬 바람과 거센 빗줄기가 몸을 때리고 나서야 아픔이 느껴졌다.
어릴 적 주사를 맞을 때, 다른 애들처럼 무서워하지도 울지도 않는 아이를 어른들은 잘 참는다며 칭찬했다. 하지만 아픔은 천천히 다가왔다.
소리 없이 우는 아이를 달래는 건 언제나 할머니 몫이었다. 외할머니는 이런 손녀의 뒤끝 작렬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넓은 치마폭으로 감싸주었다.
어릴 적 홍역을 앓고 후유증으로 천식이 생겼다. 감기가 오거나, 격하게 움직이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가쁜 숨을 진정시키려면 천천히 숨을 쉬어야 했다.
방황은 늘 잠재돼 있었다. 혼자 헤매는 날이 많았고, 알 수 없는 반항심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고요하고 잔잔한 표면 아래 화염과도 같은 분노가 일렁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에 줄곧 겪었던 질병에 대한 고통, 마음껏 움직일 수 없었던 신체적 제약들에 대한 원망, 또는 나약함에 대한 저항심리가 아니었나 싶다.
'숨을 쉰다'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 당연치 않을 수 있음을 체득한 후 어린 마음에 나름의 방어기제를 만든 듯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두렵고 힘들 때 천천히 숨 쉬고, 기다리며, 괜찮다고, 다 잘 될 거라고, 자기 최면을 걸곤 했다. 격한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러고 나면 내면이 진정되면서 막혔던 가슴이 풀어졌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이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삶을 관조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게 편안하고 좋은 나이가 돼서일까.
요즘, 많이 걷는다. 차마 보고 듣고 알지 못한 것들을 위해 천천히, 느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