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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r 14. 2018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책을 접하게 된 동기는 「타임즈가 선정한 최고의 책」 목록을 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본질을 심각하게 또는 진지하게 다룬 소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제목 자체만으로도 생의 철학적 깊이가 느껴졌다. 특히 제목이 주는 중의와 아이러니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를 깊은 의문으로 몰고 갔다.

제목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가 과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지 또는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는 건지, 무질서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참을 수 없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참을 수 없는 존재라면 왜 가벼운지 , 또 존재의 가벼움이 참을 수 없다면 존재하는 모든 생명 그 자체가 가벼운 것인지, 아무튼 말장난 같은 이 문제가 참으로 모호하고 심란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제목이 무엇이든 작가의 역량으로 보아 이 책은 그림자와 같이 무게도 실체도 없는 가벼운 존재에 대한 허무한 넋두리가 아닌 인간과 삶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담론이라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이렇듯 제목만으로도 깊은 상념과 무한한 상상에 빠지게 하는 작품이라면 효과적인 면에서 반은 성공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작품의 중심 사상을 가장 핵심적으로 압축한 것이 제목이기에 독자를 끄는 역할 또한 클 것이다.

  

작가 밀란 쿤데라는 체코의 작은 지방 출신이다. 피아니스트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음악가로서 인생을 설계하지만 결국엔 시나리오 공부를 하고 영화감독 수업을 받으며 작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책은 ´프라하의 봄'으로 영화화 되었다. 이 시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자란 작가의 역사의식은 작품 곳곳에 배어 있고 그 자신 또한 공산당원으로서의 삷을 살았으며, 그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권력의 횡포를 경험하고 '프라하의 봄'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의 다양한 인생 체험이 녹아 있는 이 작품은 자아와 세계, 사랑과 역사에 대한 총체적 삶의 모습을 일인칭이면서 동시에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비유와 상징의 철학적 메타포로 형상화 하고 있다.

  

대충 줄거리는 이러하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은 두 쌍의 남녀이다. 체코 공산주의의 민주화 과정이 소련군의 개입으로 좌절된 후 존재의 위기감에 휩싸인 채 섹스와 사랑, 즉 육체와 영혼의 갈등 속에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자유, 사랑과 성 그리고 그들이 속한 문화와 정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며 존재와 삶에 대한 본질적 의미와 마주친다.

  유능한 외과의사인 토마스, 그 인물의 전형은 아마도 ‘돈 후앙’일 것이다. 획일적인 사랑을 거부하는 그는 성에 대해 자유롭다. 사랑과 섹스는 별개라 생각하며 많은 여자들을 가볍게 만난다. 그는 섹스 후 그의 침대에서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는 상대는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옆에 누군가와 함께 잔다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한다. 섹스가 끝나면 각자의 침대로 돌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의 첫 번의 결혼 생활은 아들 하나를 둔 채 2년 만에 끝나버리고 만다. 그는 끊임없이 강요받아야 하는 사랑과 책임의 의무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혼 후 그는 여자를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갈망하게 되고 그 모순된 감정 사이에서 어떤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가 여자들을 만날 때마다 내세운 것이 ‘에로틱한 우정’이며, 자기 합리화 속에서 많은 여자들을 부담 없이 가볍게 만날 수 있었다.

사랑과 섹스에 대한 그의 이중적 삶의 방식은 테레자와의 만남으로 변화가 생기고 그는 그 것에 대해 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는다. 그는 테레자가 자신의 삶 속에 깊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또한 갈망한다. 그는 그녀를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하며 그녀와의 관계를 가볍게 생각하려 애를 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왔을 때 마침 그녀가 지독한 열병을 앓아 자신의 침대에 눕게 되고 그 순간 느꼈던 연민, 즉 그녀는 자신이 돌보아 주어야하는 ‘바구니 속  아기’임을 강렬히 느끼게 된다. 그는 그가 느끼는 감정, 즉 연민이야 말로 사랑의 책임임을 깨닫게 된다.  이와 달리 테레자는 토마스와의 만남을 운명적으로 생각하며, 그를 자신의 구원자라 여긴다.

  그녀는 한 시골의 카페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이며, 자신이 처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길을 책 속에서 찾고 있다. 그러던 중 토마스가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건, 즉 그는 그가 일하는 병원의 원장 대신 그 곳으로 가게 되었고, 우연히 그가 묵은 호텔의 카페에서 일하는 그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저속하게 농만 걸어오는 사람들 사이에 책을 읽고 있는 그의 고상한 모습을 보고 호감을 느낀다. 잠깐의 만남을 통해 토마스의 명함을 받은 그녀는 그것을 사랑의 징표로 여기며 그를 찾아 프라하로 간다.

  테레자는 그녀의 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녀의 고상한 영혼은 어머니의 저속한 삶의 방식을 용납할 수 없다. 그녀는 악몽을 꾼다. 그녀의 잠재의식에 뿌리박힌 부정한 모습들은 종종 그녀의 꿈에 나타나 고통을 준다. 그 두려움은 영혼을 더럽히는 육체적 방탕, 엄마의 삶에서 보았던, 토마스의 끝없는 여성 편력 속에서 보았던 부정의 모습이었다.

  사비나, 토마스와 에로틱한 우정을 지속하며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그녀는 화가이다. 그녀의 삶 속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구속하고 통제하는 공산주의 사회와도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그녀는 공산주의를 혐오하며, 그녀의 아버지와 다름없는 고국을 가슴아파하지만 자유를 찾아서 스위스로 망명한다. 그녀는 획일적이고 틀에 박힌 고정관념과 생활을 끊임없이 거부한다. 그녀에겐 배신이란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열정이다. 끝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며 그 새로움이 자신을 구속하는 진부함으로 변할 때 그것을 과감히 버리며 배신한다. 그것은 사랑에 있어서 고통이 따르는 행위임에도 그녀는 무거운 진지함을 버리고 순간의 흥분과 열정을, 그리고 가벼운 배신을 선택하는 것이다.

  프란츠는 학문을 업으로 하는 대학교수이다. 그는 사비나를 만나기 전에는 둘도 없이 모범적인 가장이고 남편이며 아버지였다. 하지만 사비나를 만나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의 학문적 철학은 공허한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실천 속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는 모든 거짓의 원천은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의 분리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 ‘진리 속에 산다는 것'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장벽을 제거 하는 일이다. 그는 부인을 오래전부터 사랑하지 않았으며, 사비나를 알고부터는 그 사실을 감추고 산다는 것,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되고 진실하지 못한 행위인지를 깨닫고 부인에게 진실을 말하게 된다. 그리고 사비나와의 사랑과 삶을 꿈꾸며 집을 나오게 된다. 하지만 사비나가 자신을 떠나게 되고 그는 괴로움에 방황한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어린 제자와 함께 살게 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늘 사비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늘 꿈꾸어 왔던, 세계를 향한 정의와 진리에 대한 실천을 대장정을 통해 실현하려 하였다. 그는 평화와 정의를 꿈꾸는 모임의 한 단체가 주최하는 캄보디아에서의 행진에 참가하기로 결심 하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사비나의 혐오와 증오가 자신이 이일을 해야 하는 필연성을 더욱 정당화시키는 듯 했다. 그가 이 행진에 참가하는 모습을 그녀가 안다면 매우 행복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곳에서 강도의 습격을 받고 목숨을 잃게 된다.

  결국 이 소설의 결말은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토마스는 공산주의 체제의 끊임없는 감시와 강요와 협박의 굴레를 벗어 나기위해 의사 직을 그만두고 테레자와 시골로 내려온다. 그 곳에서 창문을 닦아주는 일을 하며 몸은 고되지만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그리고 테레자와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진정한 사랑의 무게를 육체는 감당하지 못했을까? 그 둘은 읍내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함께 죽고 만다.

  

이 작품은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 실존 문제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과 시대와 역사의 흐름에 거역할 수 없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문제를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이분법적 측면에서 조명해보고자 한 것 같다. 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대칭적이고 모순된 의미의 불협화음, 즉 육체와 영혼, 삶의 의미와 무의미, 시간의 직선과 윤회성,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부정과 긍정, 우연과 운명, 등 상반된 의미의 언어를 전혀 다른 전형의 인물들을 통해 형상화시킴으로써 사랑의 모순되고 이중적인 본질을 파헤쳐 궁극적 인간존재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또한 이 소설에서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는 ‘프라하의 봄'은 정치적으로 핍박당하는 체코의 지식인들의 절망과 고뇌를 그리고 있으며, 공산독재의 횡포와 야만성을 고발하고 있다.

  ‘가벼움과 무거움'으로 시작되는 제1부에서 작가는 니체의 ‘영원한 회귀’ 사상을 언급한다. 그는 영원한 회기의 신화를 부정의 논법을 통해, 한번 사라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을 하나의 그림자로 비유한다. 그래서 ‘그 인생은 아무런 무게도 없고 처음부터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서, 인간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게 살아보려고 해도 그 잔혹과 아름다움조차도 무의미하다’고 역설한다.

  영원히 회귀하는 것은 무겁고 진지하며 의미 있는 것이지만, 한번으로 사라지는 것은 가볍고 자유롭다. 니체는 ‘영원 회기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것을 배경으로 한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 있다.

  이 문제는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 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빛­어두움, 두꺼운 것-얇은 것, 뜨거운 것-찬 것, 존재-비존재와 같이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 되어있다고 한다. 그는 이 모순의 한 극단은 긍정적이고 다른 쪽은 부정적이라 했는데, 그 중 가벼운 것은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은 부정적이라 생각했다.

  작가는 묻는다. '무거운 것은 진정 끔찍한 것이고, 가벼운 것은 아름다운 것일까?'  그리고 말한다. 무거운 짐은 격렬한 생명의 표상이고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 진다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의 본질을 이렇게 생각한다. '존재의 탄생과 소멸은 영원히 반복되는 자연의 법칙이며 인간의 실존 또한 그 유한성으로 인해 순간적이고 일회적이며 그래서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로우며 또 그림자처럼 허무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유한이라는 존재에 짐 지워진 삶의 무게는 영원히 무거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서 유한이라는 존재 위에 영원이라는 사랑을 품고 사는 것, 그 사랑은 영원히 회귀하는 것이며 진지한 것이며 무겁고 그래서 가치 있는 것이다. 작가는 무거움과 가벼움, 육체와 영혼을 통해 끊임없이 대결하고 갈등하는 인간 실존의 정체를 차가운 지성으로 직시한다. 그리고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형상화된 인물을 통해 인간 본질의 문제를 깊이 사유하게 만든다. 또한 영원한 것과 사라지는 것들을 대립시킴으로써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인지 독자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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