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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r 14. 2018

손창섭의 (혈서)

손창섭(1922~2010년)의 전후문학은 대부분 인간의 잔인하고 야만적인 행위인 전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의 단편 작품 중 하나인 「혈서」는 1955년 「현대문학」에 발표되었다.


 소설은 전쟁 후 황폐해진 사회의 모습 속에 인간의 이성과 존엄성, 가치가 파괴되고, 인간 실존이 처참하게 타락해가는 모습을 비상식적이고 병적 도착 심리에 빠진 인물들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함 속에 무방비로 노출된 소외되고 무기력한 존재들이다.


달수는 법대에 다니는 가난한 고학생이다.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추운 겨울 하루 종일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지만 어디에도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다. 어둠이 찾아와 거리가 묘지처럼 쓸쓸해지면 절망을 앞세우고 향하는 곳은 자신의 집이 아닌 친구의 집이다. 친구 집에 얹혀사는 그는 풀이 죽은 한 마리 짐승처럼 그곳으로 기어들어간다. 그의 가난과 미래에 대한 절망감은 이미 출생 이전에 존재했으며, 죽은 후에도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처럼 느껴진다.


집에는 준석과 창애가 사진 속 판박이처럼 늘 그 자리에 있다. 준수는 일사 후퇴 때 중공군에게 다리 한쪽을 잃은 불구자이다. 그는 하나뿐인 해진 이불을 덮고 자라처럼 머리만 내밀고 달수에게 아는 척을 하는데, 대개 시비를 걸거나 빈정거리는 투다. 아랫목 몇 개의 취사도구 옆에 창애가 웅크리고 있다. 그녀는 밥을 하거나 최소한의 살림을 할 때 외에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을뿐더러 거의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간질병을 앓고 있다.


이 집의 유일한 수입은 규홍의 부모가 그에게 보내주는 학비와 하숙비이다. 그의 부모는 그가 법대에 다니는 줄 알고 있지만 그는 부모 몰래 문학 공부를 하고 있다. 규홍은 문학에 도움이 된다고 불란서 어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늦게 돌아와 시를 쓰느라 밤을 꼬박 새운다. 그가 최근 쓴 시는 「血書」이다.

“혈서 쓰듯, 혈서라도 쓰듯 순간을 살고 싶다.

모가지를 이 모가지를 뎅강 잘라 내용 없는 혈서를 쓸까!”

이처럼 밤을 새워 쓴 시를 여기저기 투고해 보지만, 내용처럼 허망하게 규홍의 시는 어디에도 실리지 않는다.


준석은 규홍의 시를 경멸한다. 詩 나부랭이나 짓는 규홍을 이해하지 못한다. 남자는 강해야 하는데 시나 짓는 것은 나약하고, 인생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라 생각한다. 그의 유난히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심리는 달수를 대하는 행동에도 나타난다. 툭하면 달수에게 병역기피자라며 그를 몰아세운다. 달수가 공부를 하는 것도 현실에 맞지 않는 허황되고 쓸모없는 짓거리라며, 직업도 못 구하는 지식인의 무능함을 비난한다. 그런데 이런 준석의 태도에는 병적인 심리가 내재돼 있다. 불구자인 자신의 처지와 그를 지배하는 사고의 괴리가 그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열등감이 달수를 괴롭히는 방식으로 표출된 듯하다.


창애라는 인물 캐릭터는 독특하다. 작가가 그녀를 통해 나타내고자 한 의미가 뭘까? 여성이기에 더욱 애틋하고 가슴 아프다. 그녀 주변의 남자들은 그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저 둥그러니 내던져 있는 짐짝 취급한다. 그녀의 수동성과 극단적 무기력증은 소외와 무관심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리라. 그녀의 아버지 박노인은 筆士로 여기저기 행상을 다닌다.

노인에게 그녀는 짐처럼 거추장스러운 존재이다. 그래도 딸인지라 한 번은 규홍에게 그녀를 배필로 삼아줄 것을 간곡히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로 인해 준석과 달수는 그녀와 규홍의 혼사문제에 대해 논쟁을 하곤 했는데, 그런 이야기들이 오갈 데에도 창애는 자신과 아무 상관없다는 듯 무관심과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규홍도 히죽거리며 그들의 이야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본다.

이처럼 당사자가 철저히 배제된 우스운 상황은 비주체적 인간의 소외를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작가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풍자하며, 전쟁이라는 극한 환경 속에 아무 잘 못 없이 내던져진 소시민의 비극적 삶이 그들과 전혀 상관없이 이뤄진 것이라는 자조적 성찰을 드러낸다. 비상식적인 인간관계와 인물들의 설정을 통해 인간은 전혀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인간 혐오와 환멸의 감정이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듯해 우울함을 느끼게 된다.


달수는 항상 생명에 위협을 느낀다. 전쟁이 아니어도 죽음은 도 어디서든 존재한다. 미군 차가 자 바로 앞에 사람을 덮쳤을 때, 그는 자신이 우연히 살아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연히, 라는 말 속에 죽음 앞에 불가항력적인 인간 실존의 한계와 숙명적 필연성이 부각되고, 삶의 허무와 무의미함 속에 던져진 나약하고 소외된 인간 존재의 질과 대면하게 된다


추운 겨울을 견디기엔 그들은 너무 가난하다. 얇고 해진 이불을 가장 효과적으로 덮기 위해 그들은 이상한 발상을 한다. 둘씩 한 이불을 덮고 자자는 것, 그러면서 창애와 누가 이불을 같이 덮고 잘 것인지 설왕설래한다. 그러다 준석이 슬그머니 창애 옆으로 간다. 그 후 창애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달수가 눈치채고, 다시 규홍과 창애의 혼사문제로 둘이 다투게 된다. 달수는 나름 자신의 방식대로 창애의 배를 문제 삼아 규홍과 창애의 혼사는 부당하다고 항변하지만, 결국 화가 난 준석이 달수에게 병역기피자가 아니면 혈서로 증명하라면서, 달수의 손가락을 식도로 자른 뒤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현대문학’에 실린 이 짧은 단편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예전에 손창섭의 소설 ‘잉여인간’을 읽어 본 적은 있었다. 제목에서도 느껴지지만 그의 작품은 인간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 주로 극단적이고 과격한 인간 군상의 처참한 삶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들이 많다. 소설의 분위기는 음울하면서 불안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은 있지만, 왠지 삶의 희망을 전하는 글의 울림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의 삶이 반영된 그의 작품들은 거의 자기모멸과 삶의 회의, 허무감, 인간에 대한 극단적 혐오감 등이 관통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삶이 순탄치 않았음을 감안할 때 인간과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인생의 여정에서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진정 희망은 없을 것이다. 삶이 전쟁처럼 잔혹하고 혹독하더라도, 그것조차 의미가 있는 것이며, 부조리하고 모순된 세상에 던져진 삶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있는 것처럼 잔인한 세상이 있기에 인간의 순수한 영혼과 강인한 정신이 돋보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전후문학의 대표 작가로서 우리 문단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문학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전쟁이 인간의 심신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 경종을 울리며, 인간 존엄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또한 그의 작품 속 어두운 인간 실존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한편으론 이런 자각을 통해 인간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로부터 모두 자유로울 수 없으며, 원죄처럼  영원히 되물림 된다는 비극적  인식을 얻게된다. 손창섭의  소설은 이런 생의 본질을 꿰뚫는 예리함이 있다. 그래서  불현듯 삶자체가 죄닦음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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