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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Dec 28. 2017

희생은 없다


사례 1. 여자는 남자가 마음에 안 든다. 나는 왜 이런 남자를 만났을까 가끔 짜증이 나기도 한다. 확 헤어질까 싶다가도 그 동안 쌓인 정도 있고 곧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홀로 되는 것도 무섭다. 일주일 만에 만나는 오늘 데이트에도 이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늦었다. 남자가 얼굴 가득 미안한 마음을 담은채 다가오자 여자는 한마디 한다.
 
 “야 너 나니까 너 같은 애 만나주는 거야. 누가 너 같은 애 만나주냐. 다 이 누님이 희생하는거니까 늦지 좀 마라!”
 
사례 2. 100명 정도의 직원이 있는 서울전자는 엄청난 성장은 아니지만 매년 그래도 꾸준히 성장을 하고 있는 건실한 제조회사이다. 그 회사의 연구소에서 근무를 하는 김과장은 항상 불만이 많다. 입사 7년차인 김과장은 회사 면접 봤을때 소위 말해 낚였다고 생각한다. 면접 때 사장이 울부짖었던 그 좋던 가치들은 다 어디로 간걸까. 왜 나 같은 고급인재가 이곳에서 매일 업무에 시달리며 뻔한 일을 하고 있어야 할까. 어느날 회식에서 한잔을 하다 취해서 동기인 영업팀의 박과장한테 본심을 얘기한다.
 
 “야, 우리 정도면 어디가도 이것보다는 대우 더 해주지 않을까? 우리가 이렇게 희생하며 회사를 지키고 있는데 회사에서 알아주기는 하는거야? 내 피 같은 7년의 청춘이 아깝다, 아까워!”
 



위의 두 사람은 모두 자신들이 현재 ‘희생’을 한다고 얘기를 하고 있다. 희생을 하고 있다고 믿기에 불만이 쌓이고, 그러하기에 ‘현재’에 존재하며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럼 과연 진짜 희생일까? 희생의 사전적인 의미부터 알아보자.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림. 또는 그것을 빼앗김.


사전적인 의미를 봐도 희생을 얘기하려면 먼저 ‘다른 사람이나 목적’을 위해야 하고, 또한 자신의 더 큰 ‘이익’을 바치거나 버려야 한다.


두 가지 모두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첫 번째 사례를 보자. 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자기가 희생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희생을 논하려면, 첫번째로는 목적이 자신이 아닌 그 남자이어야 하고, 두번째로는 더 좋은 기회비용이 있어야 한다. 만약 현재 자신의 이상형이라 생각하는 다른 남자가 열심히 대쉬를 하고 있다면 여자는 일단 희생을 논할 수 있는 후보는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첫번째의 순수하게 남자를 위한다는 부분은 더 어렵다. 이상형이 대쉬를 하고 있음에도 현재의 남자친구를 못 떠나고 있다면 그게 과연 이 남자를 생각해서일까? 헤어질때의 내가 느낄 껄끄러움, 그 동안 쌓인 정에 의해서 내가 느끼고 있는 편안함, 완벽하지 않은 남자를 챙기면서 내가 느끼는 존재감, 이런 다양한 정신적인 조건들도 선택에는 영향을 준다. 정말,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두번째 사례의 김과장은 좀 더 명확하다. 연봉 4천을 받는 김과장은 이미 다른 회사에서 6천을 제시했는데 자기는 희생해서 남아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단언하건데 그 이면에는 다른 요소들이 숨어 있다. 회사를 옮기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두려움, 이곳에서 익숙해진 업무를 벗어나는 것에 대한 귀찮음, 어렵게 쌓은 정치적인 이해 관계를 버리는 것에 대한 아까움, 심지어 집과 회사가 멀어지는 것에 대한 출퇴근 시간의 고려까지. 정말로, 절대적으로, 회사를 위해 남을 직장인이 있을까?

이해 관계란 단순 물리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 정서적, 미래가치, 사회적, 모든 것에 대한 집합체가 모두 이해관계이다. 그리고 우리는 필연적으로 본인에게 유리한 길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호모사피엔스에서 생존을 위해 진화된 인간의 뇌는 여러 요소를 분석하여 본인에게 유리하고 불리한 것에 대한 객관적인 대답을 내놓고 우리는 이에 따르게 된다.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여자는 자기 수준에 맞는 남자를 만나고 있는거고, 김과장은 자기 수준에 맞는 회사를 다니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하루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이별을 하고 이직을 한다. 저 둘은 그 선택을 할만큼 현재의 선택이 나쁘지 않을 뿐이다. 아니면 현재의 이득을 넘어서는 새로운 조건이 없을 수도 있다. 그 어디에도 ‘희생’은 없다.

자본주의의 기본 이념인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수요와 공급이 있는 모든 곳에서, 외부에서의 조정만 없다면 ‘보이지 않는 손’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의 기본 바탕은 이기심에 있다. 모두가 이기심을 추구할때 자연스레 평형이 생긴다는 것이고 우리 또한 결국 그 테두리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희생은 없어도 강요는 있을 수 있다. 외부적인 요소로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내릴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상대적으로 좁아진다면 이는 강요라 볼 수 있다. 성별에, 인종 차별, 나이 등 우리는 현재 사실 평등하지 않지만 평등하다고 위장한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강요도 희생은 아니다. 일단 선택의 폭이 100이냐 30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결론적으로는 자기의 선택폭에서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현재의 위치를 ‘희생의 집합체’로 받아들인다. 나는 더 할 수 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여기에 머물고 있는 ‘안타까운’ 인재로 받아들인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아래보다는 위를 바라보는 인간의 진화적인 본능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항상 현재 자신의 위치에 불만을 가지게 되고, 상대방에게 내가 한 만큼의 희생을 강요하게 되고, 그만큼 상대방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결과적으로는 자신에게 불만족하여 행복과 멀어지게 된다.

사실 희생이냐, 강요냐, 선택이냐, 이게 뭐 중요할까. 중요한건 자신이 주도적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 삶의 주도권이 중요한데 희생을 논하는 순간 이 주도권을 놓게 된다. 실제로도 진정한 ‘희생’은 없다고 믿지만 만약 있다 하더라도 이를 ‘선택’으로 포장해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제일 중요한건 스스로의 행복이고 행복은 자발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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