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UX Writing Lab Feb 14. 2020

신앙교육: 느린 아이 세상으로 나오기

심정섭 작가는 『1% 유대인의 생각 훈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의 의미를 공부하는 시간을 떼어놓아야 한다. 

.... 

육신의 욕망과 물질적인 풍요에 갇혀 지내는 사람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영적인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시간을 떼어 삶의 의미에 답할 수 있는 공부 시간을 반드시 확보하길 바란다."




다섯 살 어린 나이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었던 내 아빠는 굶어 죽지 않는 것이 필생의 동기였다. 본인과 가족, 일가 친족 형제 모두가 밥 세 끼를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 꿈이고 과제였다. 이 일념으로 대한민국 고도 성장기의 혹독한 근로를 감내하며 살았다. 



세 끼 거르지 않고 먹기, 교육의 한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기, 장남으로 부모를 모시기라는 필생의 목표를 향해 달린 결과 꿈을 이뤘고,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그 목표가 ‘성취된’ 노후 생활을 보내고 계신다. 




이제 여생을 배를 곯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고,
네 자녀 모두 훌륭히 독립시켜 
스스로 먹고 살 정도로 훌륭하게 교육을 시키셨으니
아빠의 삶은 행복하고 기쁨에 충만할까? 




이상스레 목표를 향해 달려왔던 에너지, 목표를 이룬 기쁨을 아빠에게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우리 세대는 민주화, 경제화를 위해 헌신한 윗세대의 땀과 눈물을 바탕으로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물려받았다. 높은 지체의 사람들만 누릴 수 있었던 수준 높은 식생활, 교육, 민주화, 울창한 숲, 여가, 안전 등 한반도 국민의 역사상 가장 살기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행복하고 감사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풍요로운 가정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우울, 과시, 피해의식, 성취욕의 형태로 드러나는 모습은 모두 평안함을 찾지 못한 이면의 모습이다. 





좋은 대학, 직장에 가면, 좋은 남편을 얻으면
좋은 삶이 보장되는 줄 알았는데
성취가 주는 만족감은 순간에 불과하다. 




곧이어 ‘다음에 뭘 하지?’ ‘내가 왜 여기에 있지?’라는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살아가는 이유를 스스로 찾지 못하고 남이 정해놓은 인생의 행로를 따라봤자 그 어떤 만족감도 없었다. 



열심 사회인 대한민국의 구호대로 ‘더 공부하고’ ‘더 책을 읽고’ ‘더 여행하는’ 시도조차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서 충실한 역할을 해내는 기계의 부품에 불과할 뿐 생명력 넘치는 인생이 아니다. 물리적인 목표는 과정일 뿐 결코 나를 대변해줄 수 없다. 




내가 왜 사는지를 알고
그 사명에 따라 사는 것만이
모든 삶의 조건을 뛰어넘는 영원한 기쁨의 길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왜 사나?”라는 질문에 답이 없으니 그 위에 어떤 것을 올려도 쉽게 무너진다. 



오랜 허무와 방황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 했고, 나는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에게서 해답을 찾았다. 



좋은 대학에 가도 좋아, 가지 않아도 좋아, 성공해도 좋아, 성공하지 않아도 좋아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나 자신의 가치는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그렇게도 옭아매던 아이, 미래에 대한 초조함이 결국은 좋은 결과에 대한 나의 집착이었을 뿐, 삶에서 큰 의미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오자 비로소 평화롭고 중용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인생의 방향이 수정되면서 이제 어린아이 같은 작은 발걸음에 불과하지만 우리 가족은 속박에서 벗어나 그저 기도와 대화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려고 한다. 







모태 신앙은커녕 신앙조차 없었던 내가 이렇게 변하게 된 건 작가 심정섭 선생님이 주재하는 필리핀 기도원에 방문한 이후부터이다. 



선생님은 1년에 두 번씩 신앙인, 비 신앙인 가리지 않고 지원자를 모집하여 필리핀 하비루 정글에 위치한 기도원에 방문한다. 주일 교회도 못 나가는 사람이 산 넘고 물 건너 기도원까지 간다는 건 기초 체력도 없는 사람이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하는 셈이다. 



하비루 기도원은 기독교 신앙을 중심에 두고 기도하며 성경을 공부하는 생활 공동체이다. 한국의 한 교회 목사님이 개척하여 20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필리핀에 신실한 신앙인을 배출하여 그 신앙인들이 필리핀, 유럽으로 퍼져 나가 교회를 세우며 포교에 앞장서고 있다. 나와 정원이는 2018년 봄 동행에 합류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9시 잠드는 시간까지 기도, 성경 공부, 공동체 유지를 위한 일상생활을 함께 했다. 야자수 나무에서 바로 따서 마시는 코코넛 주스, 나무에서 완숙돼서 먹는 열대 과일은 환상이다. 비닐봉지 하나까지 쓰이지 않는 게 없다며 감사함을 연발하는 목사님. 음식물 찌꺼기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동물의 배설물은 비 맞고 햇빛 받아 다시 질 좋은 땅의 거름이 된다. 우리가 가지고 온 과자 봉지, 학용품들만 쓰레기라면 쓰레기이려나. 



이 곳의 아이들에게 한국 손님은 산타이다. 어릴 때 외국에 다녀온 사람이 선물로 주시는 볼펜 하나에 며칠 밤을 기뻐한 것처럼 우리에게 흔한 도화지 한 장, 초코파이 하나가 이 아이들에게 무한한 기쁨을 선사한다. 바퀴 빠진 자전거 한 대로 수십 명이 몇 시간을 거뜬히 보내고, 색종이 한 장도 모든 아이들이 나눠 쓰는 질서가 생활에 자연스레 잡혀있다. 풍요는 축복일까, 저주일까. 우리는 더 가졌지만 더 불행하다. 제한된 자원을 최대로 활용하는 창의력을 잃었다. 선물의 기쁨, 주는 사람에 대한 감사함이 사라졌다. 




이 곳에서 편견에 가려진 참 신앙을 발견했다.
신앙은 세속과 떨어져서 회개만 하는 수도승 같은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도 아니며,
부를 축적하는 비즈니스는 더구나 아니다.

그저 위대하고 선한 절대자의 자녀에 걸맞게
선하고 신실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었다. 




짧은 일정을 보냈을 뿐인데 돌아오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회복되었다. 기도원을 나와 공항의 수세식 화장실을 마주하고 딸과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루하루 신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사명을 갖게 된 지금은 그 어떤 물질과 조건으로도 얻을 수 없던 행복과 평안을 경험하고 있다. 




야자수 잎?으로 손으로 얼기 얼기 엮어 쓰레기통을 만드십니다. 









하루는 "염려하지 말아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는 성경 구절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대화를 나눴다. 딸아이는 예민하고 걱정이 많아서 어떤 일을 시작조차 하지 않거나, 무척 소극적이어서 걱정이 많았다. 어느 날 딸이 



"요즘 하나님께 믿고 맡기는 걸 잘하게 된 것 같아"라고 말한다. 


"무슨 말이야?" 


"오늘 영어 숙제에 엄마 사인을 받아야 하는데 안 받아갔어. 

조마조마했는데 속으로 '걱정하지 말자.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고 했어'라고 계속 외쳤어. 

그런데 정말 숙제 검사 없이 지나간 거 있지” 



성적보다, 스펙보다, 엘리트 교육보다 더 딸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나님에게 의탁하기, 평안함, 위기에 의연히 대처하는 마음. 그리도 바라 마지않던 결실이다. 이걸 ‘가르치려고’ 노력할 때는 그렇게도 안되더니 같이 성경 놓고 대화 몇 번 하니까 이렇게 허망하게 배울 수 있는 거였어? 



한 번은 딸아이가 한 푼 두 푼 모은 용돈이 사라졌다. 어른들께서 주신 용돈의 일부는 저축하고, 남은 용돈은 스스로 관리하게 두었는데 큰돈을 잘게 나누어 소액권, 동전으로 지갑을 두둑이 채우는 모습이 항상 조마조마했다. 수 개념도 약해서 계산대 앞에서 지갑을 열어놓고 하세월을 보냈다. 눈에 거슬려서 몇 번 말했는데 건성으로 대답하고 만다.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액수가 인생에 큰 타격이 되기 전에 깨닫기만을 바랐다.  



그러던 중 드디어 돈을 분실해 버렸다. 천 원짜리와 동전은 그대로인데 만 원권만 사라진 걸 보면 실수로 사라진 건 아닌 것 같다. 



“엄마는 정원이가 돈을 한 군데에 몰아서 불룩하게 채우는 게 항상 걸렸어. “


“동전이랑 천 원짜리 때문에 그런 걸 뭐. “


“작은 돈이라 실속이 적다고 해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믿잖아. 

불룩하니 돈이 많아 보이고 그러니 욕심을 자극할 수 있지.

 게다가 모든 돈을 한 군데에 몰아넣었으니 통째로 다 없어지잖아.” 


“몰라 몰라, 더 말하지 마.” 


“얼마 전에 어떤 분이 돈을 잃어버렸는데 하루 금식 기도하면서 반성했대. 

그리고 돈을 찾게 되면 무조건 20%는 돌려주겠다고 하나님 앞에 약속했대. 

결국 돈을 찾았고, 약속대로 20%를 하나님에게 바쳤대.”


“그럼 나도 그렇게 해볼까?”


“그럴 수 있겠어? 분명 돈을 잃어버린 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내일 아침 엄마랑 5시에 일어나서 새벽 기도하고 오전 금식해볼까? 

기도하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기도해보자.”


“응. 알았어. 꼭 깨워줘.”




결국 딸은 돈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돈보다 더 중요한 신앙의 실천을 할 수 있었다.
자발적으로 고난을 감수함으로써 나의 문제를 진단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작은 노력을 삶에서 실천한 것이다. 




세상의 섭리를 관장하는 큰 존재를 믿게 되니 하루하루의 걱정, 염려, 성적, 성취들이 하찮게 느껴진다. 성취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부산물일 뿐 멀리 보는 안목을 갖게 되니 오늘 하루의 자잘한 사건들에서 자연스럽게 마음을 내려놓는 여유를 얻게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