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신만의 개성 인정하기
딸이 좋아하는 취미는 모두 그림과 관련되어 있다.
변함이 없다. 범위만 확장된다. 또래의 놀이나 흥밋거리에는 관심이 없다. 친구와 잘 어울리지 못하니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에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다고 한다.
1. 아기 때에는 공주 그림을 보고 따라 그렸다.
동화책의 그림을 분석하고 따라 그렸다. 좋아하는 공주책 몇 권이 버전별로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세부적인 표현들을 꼼꼼하게 비교했다. 책을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보고’ 있었다.
당시 종이 인형처럼 인물을 머리, 상체, 하체, 액세서리, 다리로 나누어 각 부위별로 여러 버전의 부분을 만들어 놓고 끼워 맞추기 놀이를 했다. 머리 끝까지 발끝까지 강약의 조절 없이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다.
2. 이 경향은 패션에도 유감없이 반영되었다.
머리에는 공주 머리띠, 공주 귀걸이, 꽃분홍색 공주 드레스(사실은 파자마), 공주 가방, 공주 샌들까지 걸쳐 입고 거리를 나섰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꽃분홍색과 번쩍번쩍 은색을 휘감고 땀도 안 통하는 폴리에스테르 파자마를 2년 동안 여름이던 겨울이던, 밤이던 낮이던 입고 다녔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다른 아이들이 예뻐 보였지만 마음껏 입게 뒀다.
꽃분홍 시절을 지나자 금색, 파스텔 색으로 바뀌어간다. 그림에 대한 민감성은 색에 대한 강렬한 감성을 낳는다. 패션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패션 테러를 거듭하며 발전하는 걸 보았기에 현재 볼 수 없이 촌스러워도 자유롭게 그 시절에 꽂히는 감각을 뽐내도록 지켜봤다.
3. 공주와 꽃분홍 시절을 지나자 머릿속 이야기를 그림 이야기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생각을 조각조각 그리더니 점차 내러티브 형식으로 바뀌었다.
글자를 최소화하고 그림으로만 표현하기에 “엄마는 잘 이해가 안되는데, 글 좀 적어주면 어때?”하고 유도해 보았으나 “나는 다 이해돼” 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림들을 버리지 못하게 해서 다 모아뒀는데 지금까지 가끔 들쳐보며 혼자 생각에 잠긴다. 자신의 그림을 보며 과거와 대화한다.
처음에는 인물 위조로 단순하게 그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배경에도 공을 들인다. 그림을 그리다 말고 갑자기 책장으로 달려가 불꽃같이 동화책을 찾아본다. 알고 보니 그 이야기에 적합한 그림을 찾는 것이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으면 책상에 쌓아두고 열심히 따라 그렸다.
만화식 그림은 본인의 상상, 아빠와의 대화와 긴밀히 연결된다. 먼저 상상을 하고, 그 상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다가, 다시 부족분을 상상과 섞기로 보충한다. 그림이 풀리지 않으면 혼자 상상하고 오겠다며 산책을 나간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림이라는 키워드로
24시간을 몰입하고 살아간 것이다.
이러니 학교 생활이 재미없고, 수업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이해가 간다.
5. 어느 순간에는 공작에 빠져들었다.
비즈, 바느질, 미니어처 조립, 레고, 고무줄 공예를 거쳐갔다. 나는 조형 감각이나 논리적 사고를 개발할 수 있는 공작 활동을 더 해주었으면 했는데 공작은 긴 호흡으로 가지 않았다.
딸에게 그림은 긴 고리로 연결되는 넓은 세계인데 반해 공작은 만드는 과정만 단편적인 세계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욕심을 내려두고 아이의 활동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6.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니 유아적인 그림을 뛰어넘어 일러스트레이트로 지평을 넓히고 있다.
전시회에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더니 일러스트레이션에는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애니메이션과 디즈니 일러스트에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 원하면 전시 도록을 사주었는데, 한 컷을 그리기 위해 어떤 조사를 거쳤는지, 색채는 어떤 근거로 어떻게 활용했는지 등 다양한 자료를 볼 수 있다.
7. 아빠의 안식년으로 1년간 미국에 살면서부터는 한복에 관심을 보였다. 한복 사랑은 내 나라, 내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다. 아름다운 한복을 알려야 한다고 그림을 그릴 때마다 한복을 꼭 넣었다. 한국의 미적 정체성을 간직하기를 바라는 아빠가 “흑요석의 한복 이야기”라는 일러스트레이션 책을 사주었다. 이 책은 다양한 한국 의상을 예쁜 그림과 색채로 표현했는데, 그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철저한 고증이 훌륭하다. 딸은 이 책에 빠져 들어 몇 달째 이 책을 교재처럼 가지고 다녔다.
아이가 좋아하는 활동을 지켜보는 과정이
수월하지만은 않다.
도대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딴섬과 같은 생활, 누구나 인정하는 크고 화려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전문가들의 권유처럼 ‘다양한’ 활동을 하지도 않고, 세상에서 배우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혼자 동화책보며 끄적거리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고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이에게 가장 잘했다고 생각한 부분은 아이에게 이 불안감을 표출하고, 비난하고, 평가절하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마음속 불안이 아이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겉으로는’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아이가 자신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 어떤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풍부한 자유 시간이 있다면 누구나 좋아하는 활동을 찾아내고, 이 활동을 지지하고 격려해준다면 흠뻑 빠져들며 스스로 확장해 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6살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미술 학원에 다녔는데 다양한 재료를 쓰는 미술 활동을 좋아했다. 미술 학원을 너무 좋아하기에 몇 번 더 갈 테냐고 물었더니 일주일에 한 번이면 족하다고 답한다. 스스로 그리는 그림은 생각, 시간, 활동이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는 큰 세계인 반면, 미술 학원의 활동은 그 시간으로 완료되는 분절된 시간인 탓이다. 아무리 미술 학원을 좋아한다 해도 소중한 자신만의 자유시간을 더 소중히 여겨주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에게 딸이 그림을 좋아한다고 하면 재능을 일찍 발견해서 좋겠다는 말들을 하는데 나는 딸이 유독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자신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 빠져드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아직 아이의 관심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자기 주도성이 없는 학원이나 수업으로 계속 분절된 시간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아이가 학원을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학원에 대한 평가일 뿐, 아이의 재능을 보여주지 못한다. 전혀 관심 없는 분야라도 선생님이 좋으면 그 수업을 좋아한다고 착각할 수 있다. 반대로 아이가 탁월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도 가르쳐주는 방식이 적절하지 않으면 싫어할 수도 있다. 더구나 학원 수업은 아무리 자기 주도성을 고려했다고 해도 어른들이 설계하고 고안한 계획일 뿐이다. 아이가 스스로 몰입하고 창조한 세계와는 무관하다.
예중이나 유학도 많이 권유하는데 이 또한 아이가 간절히 원할 때까지 보류하기로 했다. 전문적인 예술 교육의 장점이 존재하지만 있지만 어른들의 어떤 예측도 무색하게 하는 유, 청소년 시절의 자기 주도적인 재능 확장은 그 어떤 전문 교육도 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AI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대표적인 분야로 창조, 예술 분야를 꼽는다. 미술이나 디자인 분야의 인기가 계속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그림을 ‘정확히’ 잘 그리는 역할은 로봇에게로 넘어갈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보다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세계와 디자인적인 사고만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다. 명문 미대에서 실기 시험이 폐지되고 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보다 사고와 논리를 중시하는 미래 예술계의 변화는 현실에서 이미 펼쳐지고 있다. 트렌드를 따르기가 어렵지도 않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홀로 맘껏 하게 두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아직도 기계적인 그림과 입시 미술이 아이의 예술적인 재능을 끌어올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미래의 예술 사회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낼 것은 자명해 보인다.
딸아이가 주류 미술계에서 활동할지, 아웃사이더 예술가가 될지 나는 알 수 없다.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끄적거리는 자신만의 미술이 성공을 부를지 아닐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결과가 나오던지 기쁘게 받아들이고 지지해 줄 것이라는 점 하나는 확실하다.
자신의 그림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그림과 함께 하는 내향적인 시간을 가장 행복해하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제일 좋고,
스스로 관심을 확장해 나가는 모습이 그저 뿌듯하다.
엄마의 정보력, 실적 좋은 교육 기관이 아니라 몰입하는 하루하루의 시간이 딸을 쑥쑥 키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