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숙제로 국립 중앙 박물관 견학문이 나왔다.
미술관보다도 박물관을 특히 더 싫어하는데 어쩔 수 없이라도 둘러봐야 하니 쾌재를 불렀다.
국립 중앙 박물관은 전시관도, 유물도 많아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숙제를 빌미로 여러 날을 들락날락하며 유물을 샅샅이 보고 오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박문관 견학의 가장 큰 목적은
‘반감을 키우지 않는 것’이기에…
워낙 규모가 커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록할 지에 대해 미리 계획을 세워보았다.
"상설관이 꽤 넓은데 어떤 방법으로 견학기를 쓸까? "
“……”
아무 생각이 없는 게 당연하다.
"박물관 견학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쓸 수 있어. 전체적으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려줄 수도 있고,
전시실 하나만 골라 써도 되고, 유물 하나를 깊이 연구할 수도 있어.
내가 좋아하는 유물만 골라도 되고, 박물관을 조사하는 과정과 소감을 써도 돼. 이 모든 걸 혼용해도 되고.
상설관을 전체적으로 본 적이 없으니까 이번 견학기는 상설관의 전체적인 구조에 대해 적어볼까?”
생각이 없으니 거부할 수도 없다.
“우리 국립 중앙 박물관 많이 와봤지? 신석기관, 고려관 이런 게 상설관이야.
상설관은 ‘항상 상’ ‘설치할 때 설’을 써서 언제 가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전시실을 말해.
그 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이나 전시품을 보여주는 곳이야.
반대로 항상 있지 않고, 몇 달 전시하고 없어지는 전시는 특별전, 또는 기획실이라고 해.
국립 중앙 박물관은 ‘나라 국’, ‘설 립’, 즉, 나라에서 세운 거라 상설관 규모가 크고 소장한 유물도 많아.
게다가 무료야. 우리 박물관 옆에 살아서 너무 좋지?
우리가 그동안 본 건 상설관 일부인데 오늘은 상설관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자. 먼저 간판을 봐. 층별 안내도야.”
“간판이 알려주는 의미가 뭔지 알겠어? 왼쪽 숫자는 층을 의미해.
1층에 선사 고대관, 중 근세관, 2층에 기증관 서화관, 3층에 아시아관 조각 공예관이 있대.
숫자 밑에 있는 조그만 그림은 이 층을 대표하는 유물인가봐.
다 볼 수는 없지만 대표 유물 정도만 눈도장 찍고 오자.
그럼 먼저 1층부터 둘러볼까? 1층 안내도를 찾아보자~~~ 아~ 여깄다.”
“1층은 뭘로 나눠져 있다구? 선사 고대관과 중근세관.
이 안에는 또 어떤 전시실이 있는지 빠르게 둘러보고 그 안에 있는 대표 유물 몇 가지만 훑어보자.
흠... 어떤 유물을 볼까. 아. 이 밑에 이 전시실을 대표하는 주요 유물들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구나.
이것만 보고 다음 전시실로 가자고”
이렇게 1층의 대표 유물 7개를 골라 007 작전 하듯이 눈도장 찍고 얼른 다음 유물로 움직였다. 몇 개만 찾아도 여러 관을 돌아다니려면 시간이 꽤 걸려서 빠르게 돌았다. 2층에 올라갔더니 벌써 다리가 아프고 지친다. 찾는 개수를 더 줄였다. 3층까지 오니 둘 다 체력이 완전히 방전돼서 그냥 사진으로 찍고 나왔다.
박물관에 가면 딸은 힘들다, 지겹다 외치지만 자신의 관심사가 나오면 아무리 힘들어도 한참을 뚫어지게 본다.
난 의미가 있는 걸 보는데
딸은 좋아하는 걸 본다.
제 아무리 손톱만한 것이라도 귀신같이 찾아낸다. 그림이건, 제품이건, 유물이건, 동물이건 대상을 넘나들며 관심사가 기가 막히게 연결되어 있다. 난 남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며 살았는데 내 어린 시절보다 수십 배는 더 많은 정보와 물건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좋아하는 것만 취사선택할 줄 안다. 힘들다고 찡찡대는 와중에도 좋아하는 그림이 나오면 뚫어지게 충분히 시간을 들여 본다.
“ 이 그림을 왜 그렇게 오래 봤어?”
“재밌어서.”
항상 별 이유 없다. 재밌어서. 좋아서.
“무슨 내용인데?”
“도깨비가 어쩌구... 귀신이 어쩌구...”
다가가서 설명을 읽어보니 일본 동쪽 해안 지역에서 내려오는 무서운 설화를 그린 시리즈물로, 도깨비가 나무에 걸린 빨래를 보고 놀란 이야기, 배 타고 가다가 귀신 만난 이야기 등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기괴한 괴물만 잔뜩 하고 이게 대체 뭔가 싶어 설명을 읽어보니 비로소 그림이 이해된다. 설명도, 제목도 보지 않지만 그림으로 이 모든 정보를 다 끄집어낸다. 이 이야기가 표현된 그림 스타일까지 받아들인다. “보는” 힘이 “읽는” 힘보다 얼마나 강력한지 딸을 보며 배운다.
박물관을 다녀와서 집에 돌아와 견학기를 쓰기로 했다.
"어떻게 쓸 거야? "
"보고 온 걸 적으면 되지"
"그러니까.. 본 것 중 어떤 것을 어떻게 적을 거냐고"
"본 유물 적으면 되지 않아?"
그저 사진 붙이고 몇 가지 정보를 써서 제출할 수도 있지만
글을 어떻게 쓸지 계획을 세워보고 싶었다.
자신의 생각을 쭉 적어나가기만 하면 좋은 글이 되지 않는다. 뼈대를 세우고 적합한 방식으로 적합한 정보로 구성해야 좋은 글이 된다. 글짓기 수업이 별 건가, 정보 디자인이 별 건가. 생활 속에서 경험한 모든 것이 유의미한 훈련이 될 수 있다.
"이 팸플릿 좀 봐봐.."
“제목은 큰 글씨로 써있고, 아래 유물 사진이랑 상세 설명이 4~5 줄로 들어갔지?
우리가 박물관 돌아봤지만 크고, 유물도 많잖아. 그 많은 유물을 다 견학기에 쓸 필요는 없어. 글을 쓸 때는 많은 재료 중에서 무엇을 어떻게 조합해서 만들지를 정해야 돼.
이 팸플릿을 만든 사람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만든거야. 이걸 어려운 말로 정보 디자인이라고 해. 많은 정보를 독자들이 알아보기 쉽고 유익하도록 디자인해서 보여주는 것, 이게 정보 디자인이야.
정보는 이해하기 쉬워야 해. 그렇지 않은 정보는 정보를 만든 사람이 고민을 적게 한 거야. 우리가 박물관을 어떻게 둘러봤지?”
"1층, 2층 다니고, 그 안에서 보고 싶은 유물 몇 개 뽑아서 봤지."
"응. 그렇지, 상설관 전체 구조를 보고 관별로 몇 개 유물만 찾아서 봤지? 이번 견학기는 상설관의 전체적인 틀을 파악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견학기도 거기에 맞춰 작성하자.
일단 전체 층 안내를 해주고, 그다음 층별로 안내를 한 다음, 그다음에 그 층에서 본 유물 3~4 가지를 적어주면 어때? 이제 목차를 만들어 볼 수 있겠어?"
"응~~~"
견학기를 작성하는데 마음에 안들어 죽을 것 같다. 제목이 눈에 확 들어오고, 글씨도 크고 진했으면 좋겠는데, 기어가는 글씨를 연필로 적어 넣는다. 제목이랑 본문도 전혀 구분이 안된다.
"글자가 너무 작아서 안보여~ "
"난 잘 보이는데?"
"엄마는 안보여. 자세히 봐야 보이잖아. 나이 들면 눈이 잘 안보여. 이걸 보려면 일부러 신경써서 봐야 돼. 그건 숙제를 검사하는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
“알았어. 알았다고!!!”
노안 엄마의 눈에는 여전히 개미 기어가는 글씨로 보인다. 또 팸플릿을 동원했다.
“이것 좀 봐. 제목이랑 내용 보이지?”
“제목이 제일 크고 그 아래 내용은 글자가 작지? 일단 제일 중요한 건 크고 눈에 확 띄게, 그 안에 들어가는 내용은 읽고 싶은 사람만 읽으면 되니까 그보다는 작아도 돼. 크기 차이가 확실해야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보마다 중요도나 크기가 달라져야 돼. 이게 정보 디자인이야.
내가 하고 싶은 얘기만 쭉 나열하면 뭐가 뭔지도 모르고 읽기도 싫어져. 친절해야 돼. 알았지?”
"내가 보기에는 제목이 훨씬 큰데..."
"더 커야 돼. 더 진하게. 더 예쁘면 좋고. 이것 봐. 얼마나 예뻐”
아무도 안보는 본인의 그림은 온갖 색깔펜 동원해서 몇 시간을 꾸미면서 견학기에는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다. 대충 작성하고 빨리 놀아야 되는데 엄마가 설명을 해서 일을 어렵게 만드니 그저 마음에 안든다. 도대체 시원하게 알아듣고 정성스레 준비하는 날이 언제나 오려나…
내 숙제 아니니까 신경꺼야겠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용산 가족공원으로 돌아오는데 평소에 개구리를 관찰하는 웅덩이로 간다. 올챙이랑 개구리를 잡고 싶다고 한다. 박물관에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괜찮겠어? 이제 하나도 안피곤하단다.
나는 피곤이 밀려온다. 37도 뙤약볕에서 힘들다 말 한 마디 없이 개구리와 올챙이를 쫓아다닌다. 박물관 견학은 개구리 잡기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