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가정 중심의 자녀 교육, 역사 하브루타 실천하는 심정섭 작가의 저서 『역사 하브루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아이들이 삶의 중심을 갖고, 인지 교육도 더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는 다시 전통적인 인성 교육 모델로 돌아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깊이 있는 나눔을 할 수 있는 한 가지 주제와 책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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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어린이용부터 어른 대상까지 서적, 강연,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가 있고, 인성 교육과 지혜 교육을 할 만한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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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먹고사는 문제는 큰 염려 없고, 주말에 아이들과 조금이라도 함께할 시간이 있는 가정이라면 유대인처럼, 우리 명문 사대부 가문처럼, 아이들과 왜 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토론하고 소통할 수 있는 ‘따로 떼어 놓은’ 시간과 장소가 있어야 한다. 이 방법만이 놀아 주는 부모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춘기 이후에 우리 귀한 아이들을 세상과 길바닥에 내어 주는 허망한 일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
같은 저자의 책, 『질문이 있는 식탁 유대인 교육의 비밀 』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뜻있는 부모들부터 가정에서 자발적으로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애도하는 구체적인 노력을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역사의 연장선 속에서 자기 뿌리를 분명히 인식하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의 삶은 출발부터 차이가 있다. 개인의 출세만을 바라보며 흘리는 땀과 그보다 훨씬 높은 이상과 가치를 위해 흘리는 땀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남편의 회사일로 미국에서 1년간 머물면서 미국의 교육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역사 교육으로 그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교과서로 수업 중에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음악 시간에 노래를 부르기도, 장기 자랑을 열기도, 전 학년이 참가하는 큰 이벤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내가 있던 해에 마침 대통령 선거가 열렸는데 학생들도 학교에서 모의투표를 실시했다. 성공의 역사, 부끄러운 역사 가리지 않고 교육 내에 자연스럽게 녹여내어 학생들이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도록 했다.
우리나라 역사 교육과 대비되었다.
역사를 정규 과목에 포함시켜야 할지 말지에 대한 논란은 말할 것도 없고, 소수의 학생을 제외하고는 역사를 기피하는 현상이 안타까웠다.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이고, 뿌리이고, 이야기이다. 성공의 역사에서 뿌듯해하며, 실패의 역사에서 교훈을 되새긴다.
윤리가 삶의 실천이지 외우고 시험 보는 과목이 될 수 없듯,
역사 역시 정체성을 찾기 위함이지
연대나 사건을 줄줄 외우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내가 학교 교육을 뜯어고칠 수는 없으니 어쩌랴. 다행히 위의 책에서 제시한 가정교육, 인성 교육, 토론 교육에 공감하는 바가 컸고,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따라 할 수 있는 실천적인 모델이 친절하게 제시되어 있기에 동네에서 맘 맞는 사람들을 모아 역사 토론 모임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대한민국의 많은 학생처럼 역사를 암기의 대상으로 생각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간부터 역사에서 떨어져 지낸 전형적인 역사 울렁증 인간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역사 모임을 주관할 수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부분 나랑 비슷할 것이고, 만약 나보다 뛰어나다면 배우면 되고, 무엇보다 ‘하면서 배우지 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자가 해박하게 알아서 잘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함께 공부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아는 사람을 포섭하고, 동네 카페에 고지하고, 소개받아 초등생 3~5 학년이 주축이 된 다섯 명의 엄마와 여섯 명의 아이로 구성된 역사 토론 모임을 결성했다.
인원을 구성하는 것보다 더 큰 난관은 나 자신이다.
하다 못해 반장 한 번 해 본 적 없는데 운영할 수 있을까, 역사 지식이 부족해서 사람들이 실망해서 나가지는 않을까, 작가가 제시한 역사 모임의 틀을 활용하고, 하브루타에 대한 수업을 듣고, 역사책을 읽고, 식사를 준비하며 역사 강의를 들었다. 짧은 시간에 남을 능가하기는 어렵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한 발자국 정도는 앞설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준비했다.
실제로 모임을 운영하면서 내 역사 지식이 부족한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임의 초점을 ‘많은’ 지식을 줄줄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라도 깊이 있게 생각하는 것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단 한 발자국씩만 앞서가려 했을 뿐인데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지나니 점점 역사 지식이 해박해졌다.
역사적인 사실을 숙지하기보다는 자신이 이해한 바를 이야기하고, 생각이나 느낀 점을 나누는 게 더 중요했기에 진도에 연연하지 않았다. 실제로 우리는 2년 동안 겨우 대한 제국 시대에 도착했다! 개인적인 사정에 따라 멤버가 변하기도, 토론 방식을 바꾸기도 했지만 큰 틀의 변화 없이 3년째 잘 유지하고 있다. 각자 집에서 번갈아 가면서 토론을 가진 후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시켜 함께 식사 시간을 가진다.
1년이 지나면서는 현장 답사 일정도 추가했다. 현장에 가니 사건이 주는 의미가 더 크게 다가왔다. 고려 시대를 배울 때 고려 전시회를 방문하기도, 세종대왕을 배울 때는 세종로에 나가 세종 대왕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역사를 핑계로 공주로, 강화도로 놀러 다녔다.
이 모임으로 인해 우리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첫째, 우리 역사와 우리나라를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커졌다.
외워야 한다는 부담을 빼면 역사는 재미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고구려의 강인하고 그칠 것 없는 기상에 환호하고, 부패한 귀족들의 실정에 분개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가운데 5천 년 넘게 나라와 민족을 지키며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우리의 저력을 본다.
정해진 세율대로만 세금을 내면 떳떳하게 살 수 있고, 정치가들을 흉봐도 처형되지 않는 당연한 사실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누린 적 없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인권을 누리며 사는 행운아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서울에 살면서 뜨는 동네, 맛집을 다니기 급급했는데 이제는 역사의 흔적이 있는 곳이 더 좋아졌다. 둘러보니 서울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박물관이다. 주먹 도끼를 보면서 몇 백 캐럿 다이아몬드를 보는 양 감동한다. 유명 해외 관광지보다 토론했던 장소를 찾는 것이 훨씬 기대되고 흥미진진하다. 정체성과 자긍심이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우리 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둘째, 엄마와 자녀가 함께 성장한다.
변화는 엄마들에게서 더욱 확연하다. 토론을 이끌기 위해 미리 준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번 토론한 내용은 자연스럽게 호기심으로 이어져 스스로 다른 책을 보거나 영상을 찾아본다. 역사와 관련된 신문 기사가 있으면 카톡으로 공유한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그저 재미있으니 자연스럽게 배움의 열망으로 이어진다.
아이들에게 “다음 토론에서 나갈 부분 읽었니?”라고 주지 정도만 줘도 자발적으로 책을 집어 든다. 과학자에서 역사 학자로 꿈이 바뀐 아이도 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거나 입으로 표현하는 걸 꺼리는 아이도 텍스트를 이해하는 능력, 의견을 피력하는 능력이 신장하고 있다.
셋째, 대안 교육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토론을 꽤 즐긴다. 말없이 주로 듣는 아이에게 “이 모임의 어떤 부분이 좋아?”하고 물으니 “토론이 좋아요”라고 대답한다. 말하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일방적으로 듣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즐거워한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과정에서 표현의 욕구가 충족된다.
오랜 시간을 지켜보니 상대적으로 이해력이 느리거나 말이 없어 다른 곳에서는 주목받지 못했을 것 같은 아이들이 의외로 창의적이고 깊은 사고를 하는 광경도 목격한다.
아이의 강점, 단점을 직접 눈으로 보고 파악할 수 있으니 향후 아이의 진로를 모색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이들의 리서치 능력이 신장되는 중학생이 되면 각자 주제를 정하고, 조사하고, 발표하고, 답사하는 교육을 시도해 볼 작정이다.
넷째, 함께 하는 사회에 대한 자각심이 커졌다.
우리는 모임의 시작을 모금으로 연다. 그렇게 모은 돈을 주사랑 교회에서 운영하는 베이비 박스에 기부했다. 베이비 박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직접 교회에 가서 베이비 박스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목격했다. 아이들은 우리가 아는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 엄마들은 아이들을 올곧게 성장시키는 것은 좋은 성적, 좋은 학벌이 아니라 남을 돌아보고,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자세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 존재가 공동체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기 위해 모금 활동뿐만 아니라 봉사 활동과 연계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마지막, 개인적으로 가장 뿌듯한 결실은 나 자신의 성장이다.
만약 ‘역사적인 지식이 충분해지면 모임을 만들자’고 마음먹었다면 절대로 모임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부족함을 인정했다. 다만 “다른 멤버보다 한 발짝만 앞서 가자”고 마음먹었다. 많이 앞설 자신은 없었지만, 조금 더는 할 수 있었다. 정해진 부분만 읽어 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책을 교차로 비교해 가며 읽었고, 어떤 토론을 할지 미리 생각을 하고, 관련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잘 모르거나 부족한 부분은 도움을 청했다. 약점을 인정하고 손을 내밀면 기꺼이 도와준다. 나를 대신해 함께 해 줄 사람이 곁에 있고, 내가 그들을 믿는다면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더 큰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 모두 역사를 좋아하게 되었고, 아주 많이 성장했다. 모임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대단한 공력이 아니라 모임을 하고 싶다는 의지, 남들보다 30~1 시간 정도 더 준비하는 것이다.
일생 처음으로 남이 원하는 바가 아닌,
내가 원하는 바대로 주도하며 산다는 사실은
앞으로 다른 것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낳았다.
이런 작은 실천이 모이면 내가 원하는 이상, 꿈도 이뤄나갈 수 있겠다는 흐뭇한 상상을 하곤 한다.
역사 모임을 하면서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졌다. 부여, 경주는 꼭 가야 하지 않는가, 한양 도성은 필수다, 진경 산수화를 그린 정선의 그림에 나온 인왕산 풍경이 정말 지금의 모습과 비슷하다는데 이 정도는 봐야 하지 않을까. 상해와 블라디보스토크의 독립운동 현장도 가고 싶고,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흔적을 찾아 일본 도자기 마을에도 가야 하고, 축구 좋아하는 아이와 함께 스페인도 가고 싶고…
시간은 모자란데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
이제는 역사뿐만 아니라 좋은 교육, 바른생활에 대한 책을 읽으며 지평을 넓혀 가고 있다. 함께 가니 더 멀리 간다. 아이를 더 잘 키우려면 마을 공동체가 필요하다. 다양한 형태의 교육 공동체, 육아 공동체가 곳곳에 생겨 우리의 교육과 미래가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변화하는 날을 꿈 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