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가는 타고난 몸이 있어야 하듯,
미술가는 타고난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
관찰력은 사물을 정확히 이해하는 기초다.
탄탄하게 기초가 자리 잡혀야 그 위에 자신의 해석이라는 게 비로소 가능해진다.
딸아이 꼬꼬마 적부터 미술을 가르쳐 주신 동네 미술 선생님이 입이 마르게 칭찬한 것이 관찰력이다.
"다른 친구들은 그림 그릴 때 관찰하는 방법을 가르쳐 줘야 하는데 **는 가르쳐 줄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내가 생각도 못한 시각으로 해석하니 부럽고 신기해서 지켜보기만 해요."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 나는 “관찰력”이란 게 이미지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렇게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희대의 화가, 디자이너는
이제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을 그린 사람이 아니다.
누구나 보는 것을 다르게 보는 사람이다.
기계처럼 완벽히 모사할 수 있는 인물은 그 시대의 영광을 누릴지언정, 역사는 그런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 토대가 되는 것이 관찰력이다.
선생님이 "어느 날 풍경 사진을 그렸는데 하늘을 분홍색으로 그렸어요. '왜 하늘이 분홍이야?'"라고 물었더니 "그냥 분홍색으로 보였어요." 하는 거예요.
왜 딸이 하늘을 분홍색으로 봤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유난히 넓고 깨끗한 호수가 많던 시애틀에서 휴가를 보내는데 딸은 낮에 YMCA 캠프에 갔고, 끝나면 근처 호숫가로 가서 수영을 하고 들어갔다. 9시가 되어야 어두워질 정도로 낮이 무척 길었는데 7, 8시까지 호수에서 놀면서 어스륵 드리우기 시작한 노을빛이었을까. 그 분홍빛의 정체를 이렇게 추정할 뿐이다.
딸을 키우면서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중 하나가 왜 놀지도, 춤추지도, 말을 하지도 않을까? 내 기준으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그림책의 글을 읽었으면 좋겠는데 그림만 보고, 호수에 가도 수영을 하거나 모래 놀이를 하지 않고 앉아만 있다거나, 꽃이던 풀이던 가지고 무엇을 하지 않고 오래 바라보았다. 길거리에서 줍던 깃털, 총알, 코딱지만 한 조약돌, 반짝반짝 구슬들. 무언가를 '하지' 않고 그저 내 보기에 가만히 있던 나날들....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딸을 보며 나는 자주 말대포를 날려주셨다.
"그러지 말고 놀아!”
“그러지 말고 수영해!”
“그러지 말고 뭘 만들어 보자!”
“그러지 말고 블록을 이렇게 쌓아봐!!!"
이제야 딸아이 관찰력의 실체를 파악했다.
딸은 몸이나 입으로 상호 작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눈으로 상호작용하는 사람이다.
딸의 몸은 굼뜨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보였지만 눈을 끊임없이 굴리며 세계와 소통하고 있었다. 돌의 개수, 돌의 모양, 돌의 질감, 위에서 보는 돌, 아래에서 보는 돌,...
관찰력 수수께끼의 비밀이 이제야 풀렸다.
내가 일부러 키우려고 했거나, 미술 전문가에게 의뢰했으면 정해진 틀에서만 성장했을 관찰력인데 좋아하는 것을 혼자 하는 것만으로 무럭무럭 관찰력을 키우고 있었구나.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키우도록 내버려 두지 못하는 것’이 문제로구나.
관찰력이야말로 가만히 앉아 세상과 조용하게 상호작용하는 내향적인 아이의 멋진 결과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책을 보고, 땅에 떨어진 물건을 보고, 꽃을 보고, 길고양이의 느적 느적 움직임을 보더니 이제는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션을 본다. 전시회에 가면 나는 해설을 읽고, 그림을 보고, 사진 찍고, 돌아와 정리하느라 바쁜데 딸은 그저 바라만 본다. 나중에 이야기해보면 내가 여러 단계를 거쳐 파악한 내용을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이미 다 숙지했다.
글보다 그림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딸을 보며 여실히 깨닫는다. 본인이 지금껏 키운 상상력, 관찰력이 세상에서 멋지게 펼쳐질 수 있도록 좋은 멘토를 만날 수 있기를 날마다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