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디즈니의 주먹왕 랄프를 좋아했다. 한 번 꽂히면 수십 번은 봐야 직성이 풀리는 여느 영화와 같다고 생각했다. 아빠와 개봉관에서 보더니 며칠 후 나와 함께 보고, 다운로드가 가능하기를 기다려 또 몇 번을 돌려본다.
누군가 딸에게 "꿈이 뭐예요?"라고 묻는데 "너무 많아서 모르겠어요."라고 한다.
그저 겉모습만 보고 좋아하는 아이돌, 배우부터 꽤 구체적인 실천 계획까지 세운 동물 농장 만들기.. 그리고 딸의 말은 아니지만 우리 부부는 막연하게 딸이 ‘이미지를 표현’하는 무언가를 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저 이 영화가 재미있어서 좋아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나도 저 영화 주인공처럼 상상 속에서 살고 싶어
라고 말을 한다.
딸이 이 영화를 좋아한 이유, 그동안 좋아했던 것,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모두 이 한 마디로 연결돼서 다가왔다.
월트 디즈니는 아이들을 꿈과 환상에서 살게 하겠다는 비전으로 디즈니 왕국을 일궜다. 꿈과 환상을 실현시켜 준 애니메이션, 디즈니랜드, 각종 상품을 출시했다.
“모든 생명을 경외한다”는 비전이 있었기에 슈바이처 박사는 가난한 나라로 찾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술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딸은 화가가 되고 싶다, 영화 제작자가 되고 싶다, 동물 농장을 세우고 싶다는 꿈을 꾸지 않는다. 이것은 직장, 직업이다.
딸은 직업으로서의 꿈을 뛰어넘어 “상상 속에서 사는 것”, “동물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비전으로서의 꿈을 꾸고 있다. 대학, 직장, 직업이 꿈이었는데 성취되는 순간 어떤가? 내 인생을 돌아보면 직업, 성취적인 바람은 인생을 길게 끌고 가는 동력이 되지 못했다. 딸은 이보다 한 차원 높은 ‘비전’을 어린 시절에 차곡차곡 세우는 중이다.
“월트 디즈니도 아이들을 꿈과 환상에 살게 해주고 싶다는 비전으로 디즈니랜드를 만들었잖아. 딸이 어떤 방식으로 상상을 체험하게 해 줄지 정말 기대되는데"
"거기는 하루 갔다 오면 끝이잖아. 나는 그 안에서 쭈욱 살고 싶어. 주먹왕 랄프 2처럼"
"그러고 보니 디즈니의 한계가 딱 거기까지였네. 디즈니랜드는 하루 다녀오면 끝인데 그 안에서 계속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전혀 충족시켜 주지 못했네. 디즈니 크루즈가 그래서 나왔나? 배 타고 여행하는 내내 배 안에서 디즈니 캐릭터들과 이야기하고, 쇼 하고, 식사하고, 사진 찍는 여행 상품이래. 좀 더 오래 동화 세계에 살고 싶은 아이들을 위해 만든 건가 봐. 아. 맞다. 레고 호텔도 있어. 레고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그 호텔에 묵는 동안 레고와 관련된 경험을 할 수 있대."
"그런 거 말고 좀 더 길게 생활하는 데는 없어?"
"엄마가 알기로는 잘 모르겠어. 있는데 엄마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고. 상상 속에서 생활하고 살아가는 그런 멋진 일을 꿈꾸고 실현하는 대단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너무나 멋지고 어려운 일이라서 찾기가 어려운 거 아닐까. 우리 딸이 디즈니랜드나 레고 호텔 같은 걸로 만족할 수 없는 부분을 충족시켜 주는 상상 속의 세계를 만들어줘. 듣도 보도 못한 그 세계가 어떤 곳일지 엄마 너무너무 기대된다."
"응"
한껏 상기되고 눈이 반짝반짝한다.
"난 상상하는 게 너무 좋아. 동네 왔다 갔다 하며 상상하고, 방에서도 상상하고."
멍하니 앉아 눈알을 굴리고 있을 때 물어보면 백발백중이다.
"뭐해? 상상해?."
"응. 지금 한참 생각 중이니까 말 시키지 말아요."
"네네네~~~ 열심히 상상하셔요~~~ "
"상상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응. 정말 신나고 재밌어."
"엄마는 상상이라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모르는데. 얼마나 재밌고 흥미진진한지 궁금해."
"왜? 상상을 안 해봤어?"
"잘 기억이 안 나. 어릴 때 멍하니 생각하거나 생각한 걸 얘기하면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하라고 그랬던 거 같아. 그래서 상상은 쓸데없는 것, 나쁜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 같아."
"할아버지 할머니는 왜 그러셨을까?"
"상상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를 모르셨겠지. 상상보다는 공부가 실제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고. 그래도 할아버지 할머니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걸 진심으로 권한 것이니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상상한 걸 기록해 보면 좋을 것 같아. 아빠도 어릴 때 생각한 걸 글로 썼어."
"맞아 맞아. 엄마 아빠가 정원이가 무슨 상상을 하는지도 궁금하고, 정원이도 몇 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으니까."
"난 어릴 때 했던 상상 지금까지 다 기억해. 정리할 필요 없어."
"상상하고 기록하면 영화나 드라마 작가로 너무 좋은 훈련이 될 거야. 원하는 상상을 맘껏 하면서 일도 할 수 있다고. 어때 멋지지 않아? 시나리오 작가 괜찮지 않아?"
부모는 어쩔 수 없이 현실의 틀로 유도한다. 원하는 답을 정해놓고 묻는다.
"난 싫어. 상상만 할 거야."
"그림 그리는 것도 기록하는 형태지. 글 쓰기 싫으면 지금처럼 계속 그림만 그려도 돼."
"난 상상한 걸 그림으로 그리지 않아. 그림은 그냥 그림이야."
"아. 그런 거야? 그럼 원하는 대로 해. 그림이던 글이던 좋다고 생각하지만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상상을 좋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끝도 없이 많아. 아빠 말처럼 작가가 되어도 되고, 디즈니처럼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할 수도 있고, 레고처럼 완구를 만들 수도 있어. 딸 바람대로 동물농장을 만들어도 좋고. 기록을 하면 꿈을 구체화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상상이 먼저야. 아무리 기록하고, 아무리 그리고, 아무리 별 걸 다 해도 먼저 그 재료가 되는 상상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돼. 꿈의 재료가 되는 일을 가장 충실히 하는 중이니까 원하는 대로 해. 그냥 상상해."
비전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는 딸을
마음 편히 지켜보려면
나도 현실의 편협하고 갇힌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딸이 창조해 낼 상상의 세계가 어떤 현실로 나타날지 흥분된다.
이쯤에서 장난 한번 쳐보고 싶어 진다.
"월트 디즈니 같은 인물이 되려면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부터 가야 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