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심정섭은 “질문이 있는 식탁, 유대인 교육의 비밀”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4000년 동안 유대인의 저력을 만들어 낸 건 어떤 대단한 공부법이 아니라,
바로 일주일에 한 번씩 온 가족이 모이는 식탁이다.
엉뚱한 질문도 반기는 가족 식탁에서 유대 아이는 스스로 삶의 목적과 가치관을 세우고
질문력과 사고력을 키워 평생 공부 저력을 완성한다.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유대인 교육의 비결은 이것이 전부이다
……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이 부모에게 고민이나 속내를 털어놓고,
또한 부모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기회를 마련해준다.
유대인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집 밖에서 받은 온갖 상처들을 부모와 함께 집에서 치유한다.”
밥상 머리의 기적이라는 트렌드가 생길 정도로 가족과의 대화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겼지만 막상 실천하려니 쉽지 않다. 항상 바쁜 일은 있게 마련이고, 우선 순위가 밀리기 일쑤이다.
같은 책에서 저자는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절대 시간을 확보하는 것.
이것이 유대인 자녀 교육의 핵심이다”
라며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의 적금을 들라고 조언한다.
그래. 해보자.
어떻게든 되겠지.
아직 아이는 부모의 뜻을 잘 들어주니 설득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남편을 설득하는 것이 과제였다. 남편은 “하자”라고 말하면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왜 하는지”를 이해하고 나면 기꺼이 순응해 준다. 가족 대화의 의의나 사례를 틈만 나면 이야기했다. 사춘기 들어서기 전에 소통을 시작해야 아이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 설득했다. 가족 대화의 필요성에 대한 책의 구절이 나오면 '이 페이지만 잠깐 읽어봐' 하며 그 자리에서 부담없이 읽도록 했다. 좋은 동영상이 보이면 함께 시청하자고 했다. 결국 가족 대화 시간에 대한 공감을 끌어 냈고 가족 대화를 시작했다.
시작하고 나서가 더욱 험난했다. 비현실적인 공상의 이야기 말고는 말하기를 즐기지 않는 딸아이가 왜 이런 걸 해야 하냐며 불만어린 표정으로 입을 닫고 있었다.
바람직한 토론 문화를 접하며 자라본 적이 없는 우리 부부도 하나 하나 몸으로 부딪치며 배워야 했다. 대화 자리에 대한 기대 수준이 달라서 끊임없이 조율해야 했다. 나는 이 자리가 좀더 진지한 형식을 갖추기를 원했는데 남편은 생활에 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끝내기를 원했다.
끊임없이 불만에 찬 얼굴로 앉아 있는 아이, 말투는 부드러운데 훈계나 다름없는 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끊임없이 말을 끊는 것…
사회 생활에서 겪은 추한 단면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럴 거면 가족 대화고 뭐고 다 때려치자며 싸우며 끝낸 것만 번이다. 가족 대화가 교육적인 효과를 줄지, 비교육적인 효과를 줄지 회의가 들었다.
가족 대화 자리를 위해 우리가 가장 잘한 점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딸은 어차피 엄마 아빠가 그만두지 않을 걸 알고는 결국 포기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나는 남편의 부담을 이해하고 내 기준을 내려놓았다. 남편 또한 나의 바램을 이해하고 조금씩 맞춰주기 시작했다.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정해진 요일도 없이 일주일에 한 시간씩 나누는 약식 버전으로 축소되었지만 서로 기준을 강요해서 분란이 생기는 것보다 최소한일지언정 지켜나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가족대화를 시작하고 1년여의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니, 가족 대화에 대해 사람들이 강조하던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두시간은 턱없이 짧지만 대화의 물꼬가 트이니 꼭 이 자리가 아니라도 평상시에 짬짬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주제를 정하고 이야기하기도, 주제없이 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각자 생활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흘러간다. 신앙이나 고전을 펴놓고 이야기 하기도, 여행 계획을 세우기도, 각자의 미래를 그려보기도 한다.
딸 아이의 말을 끌어내기 위해 유치하고 관련없어 보이는 이야기도 다 수용했다. 유태인의 토론 문화는 쓸데없는 질문까지 전적으로 허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기에 흐름이 끊기고, 정말 지루하고 유치해도 참고 들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자 이제는 사생활, 가족끼리의 불만, 친구와의 문제도 아무 부담없이 털어놓는다.
가족 대화는 추상적이고 고차원적인 가치를
우리의 생활에서 녹여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이다.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는 사자소학 구절을 나누노라면 아이에게 효도하라고 말하기 전에 부모님께 전화 한 통 안드리는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최선을 다하라는 구절을 생각하다 보면 아이에 앞서 부모부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다짐으로 마무리된다.
무심코 먹는 우리의 먹거리도 이런 자리에서 되돌아본다. 채식 위주의 식단이 어떻게 환경을 보호하고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는지, 동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우리 가족 식생활의 문제는 무엇인지도 짚어본다.
가족 대화의 자리가 아이들의 교육에 효과적이라고 하지만 막상 해보니 아이보다 부모에게 더 교육적이다. 경청하지 않고 남에게만 지시하는 어른을 우리는 꼰대라며 비꼰다. 꼰대가 별 건가. 우리가 우리 행동을, 말을 돌아보고 바로잡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꼰대로 늙어간다. 이 자리를 통해 부모가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현명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부모, 아이들, 공동체가 같은 텍스트로 공부하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의식을 따르는 유태인을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구시대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 대화 시간을 가져보니 함께 위로하고 공감하며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유대 공동체가 부러워 죽을 지경이다. 성숙하고 지혜로운 사회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우리 나라도 가족 대화 문화가 자리잡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