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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X Writing Lab Feb 01. 2020

느린 아이가 보내는 잠재력의 신호 4

이야기 만들기 / 상상하기

이야기 만들기 



머릿속이 온갖 이야기로 차있는 딸 때문에 어릴 적부터 산책을 할 때 이야기를 만들어 주거니 받거니 했다. 




딸의 모든 활동은 머릿속 이야기를 표출하는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림은 이야기가 그림으로, 

인형 놀이는 이야기가 역할 놀이로 변한 것이다. 

이야기 만들기는 머릿속 이야기의 말 버전이다. 




서너 살 무렵 잠자는 숲 속의 공주와 백설공주를 좋아하기에 공주가 사과를 먹고 기절하면 뽀뽀하고 청혼하는 놀이를 몇 번 해줬더니 계속 그 놀이를 하자고 조른다. 누웠다 일어났다 하는 것이 너무 귀찮아서 그럼 ‘말로 해보자’ 하며 시작된 가상의 왕자 공주 이야기는 연극보다 나을 것 없는 고문으로 진화했다. 



“학교에서 누구랑 놀았어?” “저 간판 뭐라고 쓰여있지?” “저 가게는 뭐하는 곳일까?”


와 같은 현실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바로 입 닥치라는 신호. 



두뇌를 총동원해서 이야기를 마치면 3초 만에 “또 하자”. 이야기가 시작되면 “나도 같이 해도 돼요?” 묻고는 답도 안 듣고 끼어든다. 기승전결 없고, 막장 드라마 뺨치게 자극적이다. 나한테 이야기하라고 해놓고 자기 마음대로 다 바꾼다. 나쁜 역할은 다 내 몫. 



자녀랑 역사 여행 가고, 길에서 한글을 배웠어요, 슈퍼에서 계산을 배워요는 뉘 집 얘기래요. 가능은 한 거래? 그래, 뙤약볕 놀이터에서 뛰면서 노는 것보다 낫지 뭐. 



아무리 아빠가 정성껏 잘해줘도 엄마의 지위를 뛰어넘지 못했던 아가 시절 엄마의 위엄을 넘보고자 남편이 공을 들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섞기”가  탄생했다. 섞기는 무서운 이야기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섞었다는 뜻인데 처음 섞기를 한 그 순간부터 딸은 섞기와 사랑에 빠졌다. 섞기는 청출어람의 진수가 되어 어느 순간 영혼 없는 엄마의 이야기는 더 이상 찾지 않는 솜씨 좋은 육아 도우미가 되었다. 



둘이 섞기를 하며 캐릭터와 스토리 라인을 잡아갔다. 



딸은 예쁘고 모범적인 인어 공주, 아빠는 공부 못하고 인성도 안 좋은 울술라, 그 외 등장인물들이 나와서 갖가지 사건이 벌어진다. “밥 먹는 동안 섞기 해줄게”하면 밥알을 한 알 한 알 세면서 먹는다. 딸 혼자 좋은 역할을 하는 게 은근히 부아가 난다. 실제의 투닥거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때로는 교육용으로도 활용한다. 등장인물이 구구단을 외우게도 하고, 나라 교육, 경제 교육을 간간히 삽입한다. 



섞기는 상당한 두뇌 노동이지만 남편이 딸을 조정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평소 꼿꼿하고 쌀쌀맞은 외동 따님이 섞기를 위해서라면 싫은 것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길가다 너무 웃어 배가 아파 주저앉기도 하고, 남편이 영혼을 털릴 정도로 길게 해 주었음에도 “벌써 끝났어 ㅠㅠ 평생 섞기만 하고 살고 싶어”라고 해 남편을 기쁨과 공포에 동시에 떨게도 한다. 엉덩이 무거운 딸아이는 섞기 덕에 한두 시간은 넉끈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걷기를 즐기게 되었다. 그렇게 딸은 외동으로서의 재미와 즐거움을 충분히 누렸고, 머릿속 생각을 모락모락 표출했으며, 가슴으로 뜨겁게 만족하는 아빠와의 시간을 누렸다. 



문 밖에 나오는 순간 섞기를 시작하자는 통에 내 앞에 손잡고 가는 둘의 뒷모습을 유독 많이 본다. 그 뒷모습 만으로도 얼마나 열중하는지, 즐거워하는지, 사랑하는지 보자마자 알 수 있는 사랑하는 두 사람만의 소중한 시간이다. 






                                                 



상상하기




알렉스 오스본 Alex Osborn 은 유명 광고 에이전시 BBDO의 공동 설립자로, 전설적인 광고업자이다 한 기자가 "취미가 무엇입니까?" 묻자, 그는 "상상"이라고 답했다. 



뒤통수를 치는 느낌이었다. 상상이 취미일 수 있나? 취미라면 독서, 바느질, 바이올린 같이 실체가 존재하는 활동이 아닌가? 머릿속에 뭉게뭉게 떠오르는 생각이 취미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인터뷰를 본 순간 현실과는 동떨어져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딸아이의 아웃사이더적인 모습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던 행동이, 그 어떤 놀이보다 즐거운 일이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환상과 상상 속에 빠져 상상하고 상상을 표출하는 데만 빠져 있으니 현실 세계와는 도무지 교우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눈에 보이는 것, 구체적인 것, 논리적인 것은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열 번을 말해도 알아듣지 못했다. 





돌아와 생각해 보니 딸의 머릿속에 현실적인 것이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도무지 현실에는 관심 없고 느리고 착하기만 하던 아이를
"상상"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니 모든 것이 꿰맞춰지기 시작한다. 





세상의 체험이 머릿속으로 들어가 상상이 된다. 다시 상상은 놀이, 그림으로 표출된다. 이 활동이 다시 상상을 발전시킨다. 혼자만의 시간은 외로운 시간이 아니라 머릿속 생각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환희의 시간이었다. 




멍하니 앉아 생각하거나, 중얼중얼 혼자 이야기하던 꼬마 이야기꾼은 이제 꽤나 진지한 상상가로 성장했다. 이제는 상상을 입체적으로 한다. 음악을 들으면 상상이 더 잘된다며 상상전에 신중히 음악을 고른다. 걸을 때 상상하면 재미가 있다고 길에서 만날라치면 혼자 가고 싶다고 당당히 요구한다. 




수전 케인은 내향적인 사람은 유독 공상에 잘 잠긴다고 말한다. 예술이나 창작 분야에 유독 내향적인 인물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상상에 빠져 현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자연스럽게 외톨이, 공상가, 아웃사이더가 된다. 





이 아이들은 외로운 게 아니었어.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거부되었던 인간의
무한한 상상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는 중이었어.

느리다고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
억지로 현실에 꿰맞출 필요가 없었어.

마음껏 칭찬해 줄 걸.
더 상상하라고 부추길걸. 




역시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나로구나. 멍한 상상의 시간을 재능으로 인정하니 딸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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