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중가고 싶어요

by UX Writing Lab


꿈꾸는 다락방의 R=VD 에 꽂힌 딸,



“엄마 지금 내가 뭘 상상하는 줄 알아?”

“뭘 상상하는데?”

“예중 합격하는 거”



헉.... 예중....



5학년부터 '그림 많이 그리는 학교'인 예중에 가고 싶다고 했다.



자기만의 그림 스타일이 분명해 정확한 모사와 반복 연습이 중요한 입시 스타일의 그림을 끔찍히 싫어했고, 더더욱 경쟁이나 공부와는 담쌓고 자기만의 동화 세계에 살아온 아이라 단순히 그림 많이 그린다는 생각만으로 하는 치기 어린 소리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왔다.




중학생 때까지는 자신의 미술 세계를 더 깊이 팠으면 하는 마음이다.
정확성과 반복을 중시하는 훈련이 미술 교육의 중요한 한 축임에는 분명하지만
초등학교때부터는 이 훈련을 접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딸이 다니는 미술 학원은 입시와는 동떨어진 동네 미술 학원이지만 어린이 미술 교육에 대한 선생님의 가치관에 전적으로 신뢰가 있어 7년째 한 학원에 쭉 보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딸의 그림을 보면서 초등 미술의 기준과 동떨어진 딸의 자유로운 세계, 섬세한 표현을 인정하고 지지해 주셨다. 딸의 미술 엄마다.



이런 분이니 섣불리 입시 학원으로 보내기보다 예중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먼저 검증받고 싶다. 이 때가 6학년 5월 중순, 출산 휴가로 학원 운영을 몇 달째 쉬고 계신 상황인데 시간이 촉박해서 합격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진지하게 입시를 고려한다면 바로 입시 학원으로 옮기라고 조언하신다.



당장 예중 시험 준비하겠다는 아이에게 선생님이 출산 휴가에서 복귀할 때까지 1달 반을 더 기다려서 과연 자신의 스타일을 깨고 입시 그림에 적응할지 테스트먼저 하자고 했다. 당장 시작해도 될까 말까 한 판에 6월 말까지 애를 기다리라고 했다. 느리고, 천하태평에, 기다리는 건 내 특기이기도 하다. 나도 내향형 인물의 대표 주자.




이런 판국에,
7월까지 입시 맛배기만 볼 아이가,
10 월에 있을 예중에 합격하는 상상을 한다고?



나는 의심과 비판, 걱정과 같은 비정상적인 가치관에 찌든 사람이니 순수하게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딸이 R=VD 를 더 제대로 잘하겠지 싶어 ‘아직 입시 시작도 안해놓고 왜 상상부터 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억지로 눌렀다.



“입시 미술은 지금까지 그린 그림이랑 달라. 그림 스타일을 버려야해.”

“바꾸기 싫긴 한데 예중을 가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바꿀거야.”

“공부하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예중 예고에서 공부 더 많이해. 물론 미술 수업이 더 많긴 하지만 수업이 끝나면 그 때부터 미술도 하고 공부도 더 해야돼.”

“그래도 해볼거야. 공부도 더 많이 할게.”

“지금까지처럼 자유롭게 놀고 공부 안하는 생활은 절대 기대하면 안돼. 잠을 못잘 수도 있고, 싫어하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할거고, 자유로운 놀이도 못할거야. 차라리 동네 중학교 들어가면 어때. 공부하라고 안할게. 학교만 다녀. 그리고 학교 마치자 마자 미술 학원에서 살게 해줄게.”

“예중 못가면 그렇게 할게.”

“최대한 준비해봐야 3개월 반이야. 보통 예중가는 아이들은 3, 4 학년부터 시작한대. 36~ 40 개월 이상 미술과 공부를 준비해 왔다고.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해. 다른 출발이야. 떨어질 확률이 더 높아.”

“엄마는 왜 도전도 안해보고 안된다고부터 해. 떨어진다 해도 도전해볼거야.”




세상에나....



‘그림 많이 그리는 학교’에 간다는 어설픈 환상인 줄 알고 5학년때부터 예중 얘기하는 걸 눌러 왔는데 생각보다 꽤나 진지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인의 재능과 미래를 향해 매진하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더이상 미루지 못하겠고나. 마음이 급해진다. 나는 예중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입시 학원은 하나도 모르고, 지금까지 손도 안댄 공부는 어찌 할 것이며, 굼벵이처럼 방에 착 달라붙어 자기 놀이에만 빠져 있던 지난 13년의 생활을 탈피할 수 있을 지도 걱정이고...



남편과 딸이 이런 나를 비웃는다.



왠 걱정이 이렇게 많으셔.




그래.. 쓸데없는 걱정이다.
단순한 환상이던, 동경이던 이유가 있을 것이고,
본인이 간절히 원하고 선택한 길이라면
자신을 버리고 입시에 매진하면서 배울 것이고,
예중에 들어가 부딪치고 좌절하면서도 배울 것이고,
예중에 떨어진다 해도 배울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당당하게 주장해줘서 기뻐. 너는 미술의 가장 큰 재산인 그림을 좋아하는 마음, 세심한 관찰력, 우직하게 앉아 있는 엉덩이 힘을 가지고 있어. 최고의 기초 훈련을 태어나서 지금까지 닦아온거야. 처음에는 흔들리고 느릴 수 있지만 워낙 기초가 탄탄하니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정말? 내가 그런거야? 난 그게 좋은 건 줄 몰랐는데.” 갑자기 당당하고 단호해져 엄마를 당황케 하는 딸이 다시 유아스러운 웃음을 활짝 웃어보인다.



기다리면 되는구나.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한 놀이를 충분히 하고 나면 자기 재능을 향해 방향을 잡는구나. 늦된 아이일수록 곰삭고 발효시켜 더욱 깊은 내를 풍기는 명품이 되어 있다. 그림을 사랑하고 그림을 좋아하는 인생 행로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잇다. 그 길에 예중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예고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이제부터 펼쳐지는 노력, 생각, 시도, 눈물, 땀, 웃음이 모두 하나 하나의 점이 되어 인생이 길로 이어질 것이다. 12년간 튼튼히 기초 공사 마쳤으니 이제 점을 찍는 것에만 초집중을 하는 나날이 시작된 것이다.



아까워서 어쩌누... 날아가려고 하네...



이제 아빠랑 밥 먹으며 유치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놀고 싶다는 아이 끌어놓고 함께 사자소학할 시간은 있을지, 더 사랑해줄걸.. 더 놀아줄걸.. 쓸데없는 걱정이 피어 오를 것 같으니 내 할 일이나 더 열심히 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