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8 카더가든 - home sweet home
오후 네시. 북서향으로 난 창문에서 기다랗고 선이 얇은 햇살이 부엌까지 흘러 들어온다. 기다란 햇살이 바닥에 고이면 나무 장판 위로 새겨진 흔적들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집에 살던 전 주인, 전전 주인까지 많은 사람이 오가면서 남긴 흔적들. 잠시 바닥에 누워 스트레칭을 하면서 제멋대로 쪼개진 나뭇바닥에 햇빛이 고이는 걸 가만히 지켜본다. 카펫도 깔지 않은 시원한 바닥에 맨살이 그대로 닿는 기분이 좋다.
오전 동안 움츠리고 있던 창틀 위 작은 화분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뻗어 햇빛을 온몸으로 빨아들인다. 크기가 제각기 다른 화분들이 은은하게 비치는 얇은 흰 커튼은 선풍기 바람에 기분 좋게 흔들린다.
전날 저녁 널어놓아 보송하게 마른 빨래들을 개어 넣고 빨래 건조대를 치우면 기다렸다는듯 남은 햇살이 바닥을 타고 퍼진다. 햇살을 받아 도드라지는 먼지들을 청소기로 걷어내고 난 뒤 사과, 바나나, 견과류를 더한 수제 요거트를 들고 1인용 회색 소파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잠시 한숨을 돌려본다. TV도 켜지 않고 휴대폰도 멀리 밀어둔 오후 네시. 이 조용한 세상에선 우웅 우웅 선풍기 소리와 사각 사각 사과를 씹는 소리만 들린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오후의 한때. 요즘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코로나19가 심해지면서 작년부터 주 1-2회 재택근무를 하기 시작했다가 요즘은 주 4회 재택 근무를 하기 시작했다. 출퇴근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야 당연히 예상했던 재택 근무의 장점이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좋은 점도 있었으니, 회사에 있던 낮 시간 동안 보지 못했던 집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낮 시간에 집에 있는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 평일 연차를 쓰거나 주말에 하루종일 집에 머물거나. 하지만 신기하게도 주말의 낮과 평일의 낮은 또 다른 느낌이라 결국 직장인이 평일 낮, 시시각각 변하는 집의 모습을 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은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 집에 산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올해 들어 새롭게 발견한 모습들이 많다. 아침에도 어둑어둑해서 햇빛이 잘 안드는 줄 알았던 이 집이 오후에는 아침 햇살보다 나른하고 기다란 햇살이 깊숙이 들어온다는 것, 비어있는 벽이 없을 정도로 빼곡히 들어찬 목재 가구들은 색이 조금씩 다르긴 해도 이렇게 둘러보니 제법 서로 어울린다는 것도 새롭게 발견한 이 집의 모습이다.
내가 모르는 시간에 내가 사는 집은 이런 모습이었구나. 눈도 못 뜬 채 일어나 어둠 속에서 화장을 하고, 서둘러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던 때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가장 익숙한 이 공간의 새로운 모습. 새삼 새로운 일상을 마주하고 있는 요즘이다.
스무살. 서울에 와서 처음 얻은 집은 자리에 앉아 손을 뻗으면 웬만한 집 구석까지 손이 닿는 4평 남짓크기의 원룸이었다. 집을 구하는 조건은 단순했다. 학교와 가까운 곳에 월세가 그리 비싸지 않을 것. 큰 딸의 첫 독립을 위해 휴가까지 내며 서울로 온 아빠와 부동산 몇 군데를 돌며, 그리 많지 않은 옵션 중에 고른 집이었다.
새로운 1인 가구가 된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수십가지의 물건을 필요로 한다. 전신 거울부터 다리미, 분무기, 변기솔, 체중계, 멀티탭, 빨래집게, 사진 액자, 악세서리 거치대, 구두 주걱까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수십년 동안 당연하게 써오면서도 혼자 살아보기 전에는 절대로 독립적인 지출로 예상하지 못하는 것들. 게다가 당장 떠올려보면 겨우 이 작은 집을 구성하는데 그리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것들. 그런 물건들의 중요도를 뒤로 미루고 미루다 보니 결국 4평짜리 작은 집은 책상, 접이식 요와 이불, 행거, 작은 화장대만으로 채워졌다.
작은 창문 바로 앞으로 마주 보는 겨우 6층 짜리 건물 때문에 낮에도 햇빛이 쨍하게 들지 않던 3층 집.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돌아와 비틀거리다 좁은 벽에 세워둔 행거를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우르르 옷더미가 쏟아져 집을 가득 채우던 집. 혼자 눕기도 좁은 방에 술에 취한 친구들 열 명이 테트리스처럼 몸을 구겨 넣고 깔깔대며 잠들던 집.
사실 집이 좁거나 필요한 물건이 없는 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보다 더 젊고 모든 게 새롭던 그 시절은 집보다는 바깥의 생활에 더 애정이 가던 때였으니, 집은 옷을 갈아입고 잠을 자고 씻을 수 있는 정도면 충분했다. 물론 지금 생각해봐도 밤늦게 현관문을 열면 덮쳐오는 적막함과 어두운 방은 다소 우울한 기분이 드는 집이긴 했지만, 갓 서울로 상경한 스무살 신입생이 보증금 500에 월세 40을 내고 구하기엔 최선의 집이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훨씬 더 올랐겠지만.)
현재 회사에서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상품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주거 서비스다. 정확히 말하면 프리미엄 주거 서비스. 이 상품을 팔기 위해 강조하는 것은 출퇴근이 편한 강남 역세권, 보안이 철저한 신축 빌딩, 다양한 컨셉, 구조에 맞게 고를 수 있는 인테리어, 청소, 세탁, 조식까지 제공하는 컨시어지 서비스, 헬스장부터 편의점, 카페까지 갖춰진 주거 시설, 입주자들과의 활발하고 생산적인 커뮤니티다.
이 서비스의 가장 주요한 타겟 중 하나는 '첫 독립을 시작하는 30대'다. 30대에 본가에서 첫 독립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면 으레 어느 정도 예산이 높더라도 좀 더 자신의 니즈에 부합하는 집을 고른다. 그래서 이 프리미엄 주거 서비스는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옵션이다. 조금 비싸더라도 나의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을 바로 드러낼 수 있는 완벽하게 나와 어울리는 집. 불필요한 발품팔이와 낡고 취향에 맞지 않는 공간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시간과 돈을 들일 필요 없는 집.
그래서 이 서비스의 광고에선 타겟들에게 '첫 독립의 로망'을 강조한다. 빠르고 편하게 '첫 독립의 로망'을 갖출 수 있는 집. 어쩌면 이런 집이 그들에게는 '가성비'일지도 모른다.
반면 첫 독립을 시작하는 20대의 대다수는 이 서비스의 타겟이 아니다. 그들은 조금 역에서 멀고, 옵션이 적고, 인테리어가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체리색 몰딩의 문틀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감수하면서 상황에 맞게 집을 골라야 할 것이다. 특히 20대 초중반이 맞닥뜨리는 대학 입학, 첫 취업 등의 상황은 첫 독립의 로망까지 만족시키기엔 너무 빠듯하니까.
그들의 첫 독립을 위한 집은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가구와 인테리어, 다이소에서 산 몇 천원짜리 생필품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아마 몇 년 후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그들의 집은 더 중구난방의 모습들로 채워져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 그 집은 점점 더 그들의 모습과 취향을 닮아갈 것이다. 그 곳은 가장 다채로운 그들의 20대의 시간을 담으며 함께해 온 집이니까.
서울 살이 십년. 4번의 이사를 하는동안 작은 집을 채우던 물건들은 그대로 다음 집으로, 그리고 그 집을 채우던 물건들은 그대로 다시 다음 집으로 옮겨 갔다. 그때마다 각 집에 맞춰 하나둘씩 사서 채워넣은 가구들은 나무 색도 패턴도 조금씩 다르다.
그렇다고 이사를 할 때마다 가구를 몽땅 새로 살 수는 없으니 최대한 비슷한 톤의 가구들끼리 배치해서 어색함을 덜어낸다. 그리고 다시 빈 공간에 적당히 어울리는 다른 물건들을 채워 넣으면 삐걱거리면서도 조금씩 조화를 이루어 간다.
드디어 전세로 얻은 이 집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동생과 둘이 살기에는 적당한 아담하고 짜임새있는 구조의 집이다.
커튼을 달 수 있고 화분을 놓을 수 있는 커다란 창문, 가족 사진과 동생이 직접 그린 그림을 걸 수 있는 흰 벽, 사진 액자들과 수십권의 다이어리, 좋아하는 책들이 꽂힌 빼곡한 책장, 친구들이 놀러오면 직접 만든 요리를 차려 홈파티를 할 수 있는 큰 접이식 식탁. 올해 생일에 친구들에게 선물받은, 붙박이 책장과 어울리는 색의 나무 책상.
전신 거울, 다리미, 분무기, 변기솔, 체중계, 멀티탭, 빨래집게, 사진 액자, 악세서리 거치대, 구두 주걱도 있는 집.
이 집이 30대의 첫 독립을 위한 집이었다면 아마 조금 더 조화롭고 세련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톤의 가구들과 어울리는 인테리어 소품들로 채워진 진열장, 색을 맞춰 구매한 수저와 그릇들까지. 그 집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겠지만 이 중구난방 가구들로 채워진 집도 나름 친근한 매력이 있다. 조용히 소파에 앉아 둘러보니 한 눈에 들어오는 집의 구석구석이 새삼 마음에 든다.
요즘 핫하다는 인테리어처럼 세련되거나 미니멀하지 않아도 곳곳에 제각각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빼곡히 채워진 집.
요즘 핫하다는 20대처럼 시크하거나 힙하진 않아도 조금씩 만들어 온 나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풍성한 기억과 경험들을 차곡차곡 채워넣고 사는 나.
이렇게 보니 이 집도 꽤 나를 닮은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MV9kclfajk8
소파와 고양이는
어느새 섬을 이루어
미뤄둔 고민을 고요히 마주하게 하곤
빈 잔을 가득히 채웠고
아마 조금 뒤면 잠들 거예요.
점점 눈이 감겨올 때
울컥 든 마음에
미안하다 말해볼걸
좀 더 얘기해볼걸
그냥 안아볼걸
하루 끝에 서서
닫힌 문을 열 때
home sweet home
요즘 재택 근무를 하다보니 일하다 잠시 여유가 생기면 소파에 폭 앉아 쉬곤 합니다. 그럴 때 소파 앞 카펫까지 길게 들어오는 노란 오후 햇살이 참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리고 이런 평화로운 홈 라이프를 느낄 수 있게 되는 이 혼란하지만 소중한 시간도 감사하구요.
보통 이런 잠깐의 휴식에는 TV도, 노래도 듣지 않지만 가끔 이런 시간에 딱 어울리는 노래가 있어 스피커로 틀어놓곤 합니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카더가든의 Home sweet home. 평화로운 멜로디 라인과 잔잔하고 아련한 가사. 밤에 자기 전에 듣거나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들어도 참 좋은 곡이에요.
오늘의 수플레를 쓰며 찾아보니 home sweet home이라는 달콤한 이 단어가, 한편으로는 '최악의 순간'을 반어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고 하네요. 가장 편안한 순간이 최악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니, 결국 마음이 평온해야 모든 순간이 평온하다-는 뜻일까요?
(이렇게 쓰고 보니 재택근무 시간 내내 바닥에 누워 쉬는 것 같지만... 나름 열심히 일하고 있답니다.)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