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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얏삐 Feb 28. 2024

후회 없는 퇴사가 있을까

1년 1개월 만에 탈출한 광고회사

니콜키드먼 이혼 짤

매일매일 증오하고 욕하며 1년 하고도 1개월을 보냈다. 톰크루즈와 이혼 후 법정을 나오는 니콜키드먼의 짤처럼 후련하고 시원할 퇴사의 순간만을 떠올리며 버텼다. 그렇게 힘들게 얻어낸 퇴사는 달콤하기보다는 아렸다.


지독히도 미워하던 대상이 갑자기 애틋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버티는 것을 그만두자 감정의 안개가 걷혔다. 숨 쉬는 것까지 싫어하던 증오의 대상을 담담히 지켜볼 수 있게 되자, 힘들게 애쓰고 있는 한 인간이 보였다. 처음에는 형식적으로, 그저 좋은 마무리를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내 함께 보낸 시간들을 하나둘 돌아보며, 분노하느라 보지 못했던 '나쁘지 않은' 모습들을 떠올렸다.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되짚어 편지에 담아 적어내려갔다. 함께하는 시간 동안 나의 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어느새 나는 편지의 끝에 진심을 담아 꾹꾹 눌러 '감사했습니다'라고 쓰고 있었다.


누구보다 쿨하게 일하던 사수와는 마지막 순간에도 긴 말 없이, 질척한 감정 없이 평소와 같은 인사와 간단한 눈맞춤으로 마무리했다. 1년을 가장 가까이서 딱 붙어 일했음에도 퇴사 통보에 누구보다 아무렇지 않게 대처하던, 감정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앞으로 나아갈 미래에 대해서만 논의하던 그였다. "잘 다녀오세요" 그가 휴가를 다녀온 사무실에는 내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를 건넸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그는 고개만 끄덕여줬다. 항상 하듯 "들어가" 하며. 그렇게 2초간 맞춘 눈이, 항상 하던 것과 다름없는 인사말과는 다르게 느껴진 것은 내 기분 탓일까.


끝까지 증오하기만 했다면 마음이 이렇게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당함에 분노하고, 격한 분노를 쏟아내고 나면, 나에게 악인처럼 느껴지는 사람이라도 자신만의 이유와 사정이 있고, 그도 누군가에게는 선한 사람이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항상 불편했다. 분노하고 죄책감 느끼고 의외의 모습에 놀라고 좋은 점을 발견했다가도 다시 증오하고, 감정이 널을 뛰었다. 세상 사람들이 전래동화 속 인물들처럼 선과 악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면 인간관계는 훨씬 쉬웠을 텐데. 모두가 자신의 감정이 있고 나의 행동 또한 그들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을 미워하면서도 나는 그들의 감정에도 공감하고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게 괴로웠다.


미련하게도, 첫 단추를 다르게 끼웠다면 어땠을까, 어떤 행동도 비틀어서 보게 되는 색안경을 쓰게 된 일련의 일들이 없었다면, 지금 이들과는 이런 관계가 아니었겠지, 다른 모습이 되었겠지, 하는 질척한 생각들을 늘어놓아본다. 내가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면 어땠을까. 내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다른 어느 곳에 가서도 같은 결말을 맞는 것은 아닐까.


이런 내 고민에 이직을 경험한 친구는 말해주었다.

"네가 후회한다는 건, 달라지고 싶다는 거잖아. 환경을 바꾸면 같은 문제라도 대응이 달라질 수 있을 거야."

"경험이 생긴 뒤에, 새로운 환경에서 비슷한 문제를 마주했을 때 난 다르게 대처할 수 있었거든."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길었던 1년 1개월을 마무리하며 새 경험을 맞이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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