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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iii May 28. 2020

그런 생활


  아빠를 보러 다녀온 길이었고, 횡단보도를 기다리면서 였다. 옆에는 만두라는 이름표를 한 강아지와 목줄을 잡은 아주머니가 서있었다. 그녀는 전화를 걸었고, 누군가에게 ‘아이스크림 사가면 먹을 거냐. 응. 빵빠레, 아니 빵또아. 아 빵또아였어. 그럼 빵빠레 하나랑 빵또아 하나. 아직 집에 있는 거지? 그럼 사 가지고 갈게.’로 이어지는 아주 짧은 대화를 하고 끊었다. 일상은 별 일 없는 대화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크 원피스를 입은 만두는 내 샌들 냄새를 맡았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운 날씨였고 볕이었다. 문득 엄마에게 꽃을 사다 안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꽃 몇 송이와 시덥지 않은 포장을 비싼 값에 파는 것을 보고 포기했다. 부지런히 꽃시장을 다녀왔어야 했나 생각했고, 곧  엄마와 커피 한 잔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카페에 들어갔고, 더블 아몬드 비엔나와 프레첼을 주문했고, 먹었고, 마셨고, 어제 못다 읽은 책을 다시 펼쳤다. 엄마가 도착하면 커피를 하나 더 주문할 것이고, 엄마 사진을 찍을 것이며, 가만히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일이 끝나면, 일-이주일에 한 번은 엄마와 아빠를 보러 가도록 한다. 하루에 한 번은 엄마와 통화를 하도록 한다. 될 수 있으면 규칙적일수록 좋다. 하루에 한 번은 요가를 하고, 하루에 한 번은 외출을 하도록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목적인 일은 일주일에 두세 번으로 절제한다. 육류는 일주일에 두세 번으로, 되도록이면 집에서 요리를 한다. 한 시간은 글을 쓰기를, 한 시간은 산책을 하기를. 하루에 만보를 걷는다. 일이 없는 일상을 여러 규칙들로 지탱한다. 모든 것을 지킨 적은 지극히 드물다. 하지만 그것이 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를 이루는 것들 중 일부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쉬는 날 없이 매일 아침 여덟 시까지 출근을 하고 다섯 시에 퇴근하는 일의 반복이, 노트북 가방을 짊어지고 모텔로 들어가는 나날이 슬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매일이 쌓여 시간이 지나고, 나는 인간적으로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을 떨쳐버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일, 그리고 잠과 밥으로만 채워져 있는 내가 갓난쟁이와 무엇이 다를까 하는 의문. 생존과 생계에 대한 욕구 외에 아무것도 없이 흘러가는 나날이 나를 어떠한 사람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두려움. 그냥 하루하루의 테스크를 헤쳐나가는 삶이, 무언가를 만들고 부수고, 어떠한 용도에 맞게 무언가를 만들고 부수고, 시간에 맞춰 만들고 부수고 만들고 부수고 만들고 부수고의 일이 대체 무엇인지 하는 의문.


  일 년 전인가, 지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하면 직업적으로는 성장할 수 있겠지만, 경제적으로 얼마나 여유로워질까는 여전히 요원하다고, 자신은 이제 혼자 지내는 것이 외롭다고.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녀가 단단하다고, 성숙하다고, 자신의 길을 알고, 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충격은 곧 무서움으로 이어졌다. 그녀와 일부분 비슷한 나도 여전히 불안하고 외로워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소위 서른이 지나면 안정감이 생길 것이고, 마흔에는 한층 여유로워질 것이라는 이 근거없는 믿음이 우스웠다. 하지만 순진하게도 막연한 기대를 했었던 걸까. 조는 외롭다고 울먹였다. 그녀의 마음과 외로움이 그녀의 것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직업적으로, 경제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이들이 요원하게 여겼던 가치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일까. 모든 것을 채울 수 없는 인간이 가지는 유한함에 대한 서러움일까.



  종종 의문이 든다. 나는 글을 쓰면서 무엇을 만들어 내고 싶은 건지. 단어의 나열이, 배열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걸까. 확인할 길 없고, 확신 없는 마음들 때문일 것이라고. 그래서 내가 어떤 마음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생활을 하는 지, 나도 겨우 글을 통해 알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명확한 것 없이 일상을 버티는 일, 애매함 속에 둘러쌓여져 있는 기분으로 지내는 일은 어렵다. 투명함과 명확성, 그리고 확신. 아이러니하게도 일정부분 오만함의 발로로 태어난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 나는 이제 그것을 얻고자 한다. 얻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을 알아야겠다. 내가 무엇을 정말 쓰고 싶었는지를,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의 형태를, 그와 나의 눈물의 이유를, 나를 무너뜨린 마음의 정체를, 되찾을 풍경과 열린 시간 속의 그의 모습을 나는 꼭 알아야겠다.’ 고 고백한 김봉곤의 글처럼.


  아마도 짙은 나무색이 테이블이었을 것이다. 티백이 담긴 찻주전자와 찻잔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보고 앉았다. 차는 모래시계처럼 점점 짙어졌다. 오분을 넘긴 차는 점점 짙어질 것이고, 떫은 맛을 낼 것이다.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어보고 싶었다. ‘이 파도는 멈출까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그 파도에 대해 내가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그것이 전부일 것이라 생각했다. ‘멈춰요,’ 맞은편에서 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적지 않아 놀랐고, 근거 없는 위안을 받았다. 나는 그런 생활을 한다.






<그런 생활>, 김봉곤, 2020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그레타 거윅,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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