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으로 살았던 1년을 회고하며. 아니 반성하며.
새해가 시작되면 항상 계획을 세웠다.
올해 반드시 달성하고 말겠다는 야심 찬 다짐. 번호를 매기고 작년 한 해 동안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120%의 목표를 세우고 한 해를 사는 게 내 삶의 루틴이었다. 그걸 멈춘 게 2023년이었다. 너무 많은 계획을 세우다 보니 계획을 달성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돼서 의미 없이 달성만을 위해 달리는 모습이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허겁지겁 달성하고 난 후에 만나는 성취감이 그렇게 뚜렷하지도 않았다. 삶은 계획한 것을 이루지 못할 때도 틀린 것이 아니고 계획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삶을 풍성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내가 만든 계획은 내 상상력을 뛰어넘는 현실을 담아내지 못했고, 내가 만든 계획은 때때로 좌절하고 실패하고 포기하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을 수용하지 않았다. 나를 위한 계획이 맞는가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이 계획을 다 달성했을 때 나는 어떤 부분이 성장한 것일까. 질보다는 양으로 꾸려진 목표인 것 같아서 무언가 문제가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야심 차게 2023년 올해의 목표를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기”로 정했다.
뭘 해야겠다는 것을 다 내려두고 삶이 흘러가는 대로, 나에게 주어진 경로를 마음껏 바꿔가며 도전적으로 살아보겠노라 제한을 풀어버렸다. 나는 이곳에 굉장히 멋진 무언가가 세워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1년이 지나고 삶을 돌아보니 이름 모를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고, 뒤죽박죽이 돼버린 땅을 다시 가꿔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땅에 계획처럼 한다고 해서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계획이 없으면 더 무질서하게 자라게 되는구나. 계획은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낫구나.
내가 세워뒀던 명확한 계획 1개는 “한 달에 한 권쯤은” 읽겠다는 것이었다.
그 목표 하나는 목표 이상으로 달성을 했다. 2월부터 12월까지 11권의 책을 읽는 것이 목표였는데 총 16권을 읽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게 책 좋아한다 하면서 그것밖에 못 읽었냐 말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11권의 목표를 달성하고 그 이상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이다. 아 그렇구나. 계획대로 안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낮고 단단한 계획의 테두리를 둘러두면 그것이 삶의 기준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사실. 계획이 있으면 적어도 그 계획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이라도 하게 되고 운이 좋으면 달성할 수도 있다는 작은 희망을 발견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계획을 세우는구나. 아 내가 조금 더 많은 계획을 세웠다면 그 계획에 100% 달성하진 못하더라도 60-70%는 시도하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세우지 않았을 때는 절반도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피곤에 쩌든 직장인의 삶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아 나는 계획이 필요한 인간이다.
고무적인 것 중에 하나는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내가 스스로 다양한 시도를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읽겠단 다짐을 세우면 그 한 권만을 가까스로 읽고 “야~ 이번달도 해냈다” 하고 이룰 줄 알았는데 실상은 달랐다. 이왕 한 달에 한 권을 읽겠다고 맘먹었으니 최대한 좋은 책을, 재밌는 책을 골라 그 시간만큼은 유익한 독서를 하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고심하며 책을 골랐고 막상 고른 책이 마음과 다를 때는 다른 책을 더 골랐다. 아 이 책은 이번 달의 책으로 인정할 수 없어. 다른 책을 다시 보아야겠다는 마음 자체가 지금 생각해 보니 신기한 행동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내 계획을 더 완성도 있게 채우고 싶어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게으른 부분도 있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완성도 있게 퀄리티를 추구할 줄 아는 완벽주의 인간일 수도 있겠다. 내가 나를 다 안다는 생각을 버려두면 뜻밖의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계획을 안 세워 두면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더 망나니 같은 삶을 막사는 사람인데, 계획을 세워두면 작은 계획이더라도 완성도 있게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계획 이상을 달성하기도 혹은 달성하지 못해도 양보단 질에 있어서 어떻게든 달성을 만들어 가는 훌륭한 인간이라는 회고. 나쁘지 않은 결론이다.
그래서 2024년엔 계획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이 계획이 나를 얼마나 성장시킬지, 나는 얼마나 달성할지, 혹은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계획 이상의 어떤 것이 삶에 찾아올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는 작은 기준은 마련해 두겠다는 다짐. 뭔가 비장한 다짐을 너무 높게 세우기보다 작게 작게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영역의 목표를 세워두면 그 이상을 또 만들지 않을까? 내가 이룰 수 있는 그러면서도 삶에 도움이 되고 성장하는 작고 단단한 계획엔 뭐가 있을까? 그리고 계획을 꼭 1년 단위로 세울 필요도 없지 않을까. 분기별 계획을 세우거나 월별 계획을 세워서 계획을 돌아보고 체크하는 시기를 중간중간 배치해야 너무 루즈해지지 않고 다시금 마음을 잡고 계획을 생각하면 살 것 같다.
그러면 2025년에는 매 월 달성을 위한 목표를, 그리고 분기별 목표를 세우고 그걸 얼마나 달성했는가를 연간 목표로 잡아봐야겠다.
계획에 치여서 너무 숨 막히고 답답해서 벗어던졌는데 한 해를 막살고 나니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두근거린다. 재밌는 계획을 세우고 싶다. 재밌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던 재밌는 계획들을 세워봐야지. 아 갑자기 살맛 나네. 2025년 왠지 벌써 재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