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헤라 ~ 산토 도밍고 : 21.0km
예정됐던 일이 찾아왔다. 오늘 아침에 에디타는 우리보다 1시간 일찍인 6시에 떠났다. 나보고 “어쩔 거냐?”고 물어서 “난 헝가리 친구들과 오늘은 함께 하고 내일부터 혼자 걷겠다.”고 했더니 그녀는 인사를 하고는 동이 트기 전인 어둑한 새벽길에 혼자 길을 나섰다.
그녀가 가고 1시간 뒤에 우리는 오늘의 목적지인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대개 ‘산토도밍고’라 부름)를 향해 출발했다. 오늘은 22km로 다른 날에 비해 짧기에 라치가 7시에 출발하자고 해서다. 그래도 중간에 한번 커피 마시려고 바르에 들린 거 빼고는 꼬박 4시간 가까이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도착 전에 라치에게 “난 내일부터 30km씩 걸으려고 해. 그래야 9월 안에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오늘이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 될 거야.”라고 했더니 오늘 저녁 식사로 헝가리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고 한다. 지난번 김치찌개를 내가 대접하고 나서 줄곧 그는 헝가리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데 어제는 숙소에 주방이 없어서 못했다며 오늘은 나를 손님으로 초대하니 가만히 있으면 자신들이 다 준비해서 부른다고 했다.
함께 나가서 장을 보고 들어와 그들은 2시간 정도 채소를 다듬고 고기도 잘게 썰며 저녁 식사 준비에 분주했다. 난 정말 손님처럼 아무런 것도 돕지 않고 소파에 앉아서 쉬었다. 아침에 헤어진 아그네스는 오른발에 물집이 두 개나 생겨서 오늘은 안 걷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곧장 버스로 이곳으로 점프(순례자들이 걷지 않고 다음 지역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동하는 것)를 해서 그들과 함께 저녁을 준비했다.
그들은 두 가지 요리를 만들었는데 먼저 나온 것은 버섯, 감자, 당근 등 여러 채소를 함께 넣고 끓인 스프 같은 것인데 맛이 강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끌리는 게 매우 매력적이다. 오늘 저녁 식사엔 나 말고도 지난번에 김치찌개를 함께 만들었던 철형씨와 대로군(순례길에서 만난 대학 휴학생)도 함께 초대를 받았다. 다들 헝가리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메인 메뉴는 돼지고기를 볶은 것을 파스타에 얹어서 먹는 것인데 이름을 물어보니 퐬코트pörkölt란다. 오늘은 약간 국물이 있었는데 헝가리에서는 카레처럼 걸쭉하게 먹는 음식이라고 한다.
외국 음식이지만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친근한 우리 음식처럼 맛있었다. 난 그에 대한 답례로 약소하지만 근처 기념품 가게에서 산 우리나라 국기와 순례길을 상징하는 조개모양이 함께 있는 배지를 사서 한 개씩 선물했다. 라치가 내년에 헝가리에 가족들과 함께 꼭 오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체코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를 가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되면 꼭 헝가리에 가서 친구들 얼굴도 봤으면 좋겠다.
순례길에서는 만남과 헤어짐이 다반사니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고 마냥 기뻐할 것도, 헤어졌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지만 일주일 동안 함께 했던 친구들과의 헤어짐은 많이 아쉬웠다. 이제 다시 혼자만의 여행, 혼자만의 시간을 찾아 산티아고 순례길을 내일부터 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