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째 기일에 적는 편지
할아버지 안녕. 이 인사를 하기까지 3년이 걸렸어요. 안녕을 건네는 순간에도 깊은 바다에 빠진 기억을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네요. 제가 할아버지에게 어떤 말투로 인사를 건넸었는지, 나이 몇 살 더 먹었다고 존댓말을 했는지, 아니면 어딘가 어색해진 그 기류 속에서 반존대를 했는지.
옛날에는 3년상이라는 말이 있었죠. 할아버지가 예전에 알려주신 것처럼,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무덤가를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였어요. 처음에는 그게 왜 1년도, 2년도 아닌 3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2023년이 되고 3월이 되어 가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우리의 곁을 떠났을 때의 그 슬픔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죄책감, 원망, 그때 당시 느꼈던 모든 감정들이 기억나지 않아서 아, 3년 즈음엔 이 슬픔도 다 삭제되는구나 했지요. 어떻게 이걸 잊어버릴 수 있나 하는 당황스럽고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런데 며칠 전, 이모가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려 한다며 올 수 있냐고 물어보았어요. 나는 여행을 가게 돼서 못 갈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제사라는 것이, 문화적으로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거든요.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볼 수 있도록, 식사라도 한 끼 함께 할 수 있도록 문 열어 놓고 기다리는 자리라고요. 그 생각을 하니 할아버지가 너무 그리워서, 사람들과 함께 있던 자리에서 떠나 울고 왔어요. 그때서야 알았어요. 슬픔이 삭제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잠들어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감정이 살아 있어 다행이지만, 일상에 침투되지 않도록 깊은 곳에 숨 쉬고 있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영영 잘 지내지 못했을 테니까요. 지금도 그리 잘 지내는 편은 아니지만 지내지만 언제나 괜찮아지려 노력하고 있어요. 일은 그만뒀고, 아직 새 직장은 구해지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다음 일자리에 가게 됐을 때 사람대접 잘해주는 곳이면 욕을 먹든 야근을 하든 악으로 깡으로 버틸 거예요.
병원에 들어가던 할아버지의 병실 침대를 잡아주고, 장례식에서 3일 내내 일을 도와주던 고마웠던 분은 지금 제 곁에 없어요. 하지만 옆을 지켜주는 친구들과 더욱 돈독해졌고, 힘든 일 혼자서 끙끙 앓지 말라는 새로운 친구들도 생겼어요. 이모가 어떻게 설명했는지 확실한 문장을 알지는 못하지만, 할아버지가 몰라서 미안했다고 했던 병은 오락가락했다가 지금은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가 됐어요. 할아버지가 그토록 미워했던 아빠랑은 고맙게도 연락이 끊겼고, 엄마랑 이모, 이모부와 잘 지내고 있어요.
그래도 전보다는 좀 나은 것 같죠? 요즘에는 관심사도 많아졌어요. 그중에 할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것은 '사진 찍기'에요. 한 달 전 강릉을 가면서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가져갔었어요. 여기저기의 풍경과 사람 사진을 찍고, 인화한 사진들을 받으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기록된 추억과 매 순간을 함께하는 일이 인생의 큰 행복이란 것을 알았어요.
제 책상엔 아직도 할아버지와 함께한 사진이 있어요. 가장 좋아하던 이불을 뒤집어쓰고 할아버지에 폭 안겨있는 사진, 할아버지와 함께 갔던 생애 첫 제주도 여행 사진, 명동에서 초대형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는 저를 바라보던 사진, 그리고 작은 앨범에는 수많은 사진들이 정리되어 있어요. 할아버지네 집에 자주 가지 않던 저의 중. 고등학교 시절, 할아버지가 아파 병원을 전전하던 저의 대학시절, 매일이 고통이었던 저의 졸업 후 시절에는 할아버지와 함께한 사진이 거의 없지만 어렸을 적에라도 매 순간을 함께 있고 기록에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아직도 맛있는 것을 만들어 드려 볼 걸, 월급을 모아 보청기를 사드릴 걸, 할아버지와 앉아 4구와 야구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할걸. 그렇게 할아버지 집이 그리울 줄 알았으면 좀 더 많이 들릴걸. 사랑한다고 많이 많이 표현할걸.
다양한 후회를 하지만 뭔들 소용이 있겠어요. 이미 재가 되어 자유롭게 훌훌 떠나버리셨는데 말이에요.
이제는 지팡이를 안 짚어도 되고, 사뿐히 걸어 다닐 수 있으시죠? 저의 도움 없이도요. 산 구경 바다 구경도 다니시고, 친구 분들과 좋아하던 풍경 사진도 찍으러 다니시죠?
제가 재가 되어 떠날 때가 된다면 그때 꼭 마중 나와 주세요.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