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스페인] EP.2
어느 장소나 그 곳을 기억하게 하는 몇 가지 단어들이 있다. 나에게 세비야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이었을까. 오랜만에 도착한 도시에서 내가 만나고 싶었던 단어와 그것의 실체들은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굳이 찾지 않아도 너무 당연하게 한꺼번에, 허무하고도 충만하게 마주하게 되었다.
세비야 기차역은 살던 동안에도 다른 도시를 이동하며 수시로 왔다갔다했던 공간이다. 시간이 마치 어제였던 것처럼, 지금 막 어느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똑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까. 대합실의 가게들조차도 익숙하여 8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했다.
“로하!”
여전히 자그마한 몸에 밝은 기운을 가득 담은 카말라 언니가 눈앞에 등장했다. 세비야의 첫해에 동네 플라멩코 가창 수업에서 만난 일본 언니다. 스무 살에 일본을 떠나 미국, 독일, 영국 등 해외를 돌며 산 지 오래되었고 스페인 사람과 결혼해 세비야에 정착해 있었다. 동종요법 의사인 남편과 마사지와 명상을 하는 언니의 삶은 나와는 다르게 아주 건강한 삶이었는데 그 덕에 수많은 날 맛있고 건강한 밥상을 대접받았고, 언니네가 오랫동안 여행을 갈 때면 공간을 공유하며 사느라 다소 자유롭지 않은 나를 위해 그 기간만이라도 혼자 편히 지내라며 집을 그냥 내어 주기도 했다. 세비야를 떠나던 날도 마지막으로 역까지 나와 배웅을 해 주었던 사람이다. 내가 도착한 다음 날 연말 휴가를 일주일 정도 갈 예정이어서 여행 후 보자 했지만 굳이 얼굴보고 여행갈 거라고 역에 나와 주었다.
“세비야의 마지막 날 보고, 이렇게 돌아온 첫 순간에 너를 봐서 너무 좋아!”
언니와 역 밖을 나오니 반가운 향이 나는 듯 했다.
“와, 세비야 냄새!”
코 끝에 닿는 도시의 공기를 담은 냄새가 특정한 무엇이 아닌데도 그것 자체로 무형의 추억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분명 그건 세비야의 냄새, 세비야의 기억에 남겨있는 하나의 반가움이었다.
세비야에서 머물 집을 내어준 친구가 픽업을 오기 전에 언니와 역 근처 골목 작은 바에서 반가운 재회 인사를 했다. 겨울이어도 기온은 그다지 낮진 않았지만 바람은 좀 차가운 날이었다. 그럼에도 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작은 테라스 자리에 누가 먼저랄 거도 없이 당연한 듯 앉았다. 스페인은, 더더군다나 세비야는 ‘태양’이 아니던가.
마드리드부터 커피 한 잔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꼭 첫 커피는 세비야에서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망설임없이 ‘카페 꼰 레체’(밀크 커피)를 시키고, 바로 이어 간단한 따빠(Tapa, 스페인 작은 접시 안주)와 함께 한 잔 생맥주 ‘까냐(Cana)’도 주문했다. 앉아있는 바로 옆 길에는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린 오렌지 가로수가 새로울 것도 없이 무심히 서 있었다.
세비야에 왔구나.
일상의 풍경은 아니지만 일상 만큼이나 익숙한 풍경 안에 다시 들어와 있음이 그제서야 새삼 실감이 되었다. 13년 전 처음 스페인 세비야에 도착해서 맞았던 첫 아침의 기억이 떠올랐다, 밤새 에어컨 없는 집에서 무더위에 시달리다 이른 아침 나선 산책길. 세계 3대 성당이라 불리는 스페인 세비야의 대성당 옆 작은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시켰다. 나의 옆으로는 무려 100년간 지었다는 겉모습만으로도 압도되는 거대한 성당이 우뚝 서있고, 내 앞으로는 이쁜 전차가 지나갔다. 내 주위로 나와 닮지 않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오갔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이런 엽서 안,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풍경이 나의 일상이 되다니...’
다시 그때와 같은 풍경에 앉아, 이제는 일상이 될 풍경은 아니지만, 그리고 첫 만남처럼 들뜨는 설레임은 아니지만 그와는 또 다른 재회의 고요하고 익숙한 설레임이 잔잔히 느껴서 웃음이 났다.
스페인에 가도 그다지 좋지 않을 거라고, 그저 덤덤할 거라고, 뭔가 숙제같은 여행일 거라고 지나치게 건조하게 내뱉던 기대감이 생기를 찾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오렌지 가로수, 카페 꼰 레체, 까냐 한 잔’이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