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도예가의 집

스페인에서 도자기를 배우다 10

by 로하

한국에서 음악 하는 친구가 스페인에 놀러 왔을 때 동네 골목에서 매주 목요일 열리는 벼룩시장에 재미 삼아 나가 보았다. 친구는 기타 치고 놀고, 나는 그동안 이래저래 그리고, 만들며 쌓인 것들을 팔아보기로 한 것이다. 장사가 된다기보다는 동네 장에 나온 뜬금없는 이방인 셀러들이 신기해서 말을 거는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것이 대부분인 시간이었다.


그때 나이 지긋한 아시아 여성분이 유창한 스페인어로 도자기를 보시며 이것저것 물으셨다. 물어보는 걸 보니 도자기 하는 분 인 듯하여 여쭤보니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스페인에 사는 일본인 도예가 요코 아카바네였다.

그녀는 일본인이라기보다는 브라질 사람이었다. 브라질 교포로 일본에는 가본 적도 없다고 했다. 사실 살아온 시간만 생각하면 스페인 사람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40년 넘는 시간을 스페인에서 보냈으니 말이다. 우리의 공통분모는 도자기밖에 없었지만 이방인이라는 카테고리가 작용해서였을까. 가끔 길에서 마주치던 시간이 조금 쌓이자마자 금세 특별한 인연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일을 도와주고, 대신 도자기 수업을 공짜로 듣는 것을 제안했다. 아직 배울 것이 더 많은 나였으므로 작업실에서 일을 돕는 것 역시 수업이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집 겸 공방인 그녀의 공간은 먼저 돌아가진 건축가였던 남편이 그녀를 위해 선물로 지어준 굉장히 특이한 4층 건물이었다. 폭은 좁고 층층이 다른 공간들이 담겨있었다. 1층은 넓은 야외 베란다와 연결된 작업실 겸 공방, 2층은 코너에 손님방, 그다음 층은 부엌, 마지막 4층은 숙소와 화장실, 옥상이 연결되어 있었다.


스페인에서 마지막 몇 달, 집 계약 시기가 좀 애매했을 때 그녀는 선뜻 자신의 집에 들어와 보내라고 나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게다가 한 달 동안은 휴가로 브라질을 다녀오는 그녀 대신 4층짜리 독채를 혼자 쓰면서 살 수 있었다. 나의 스페인 시간에서 누린 가장 호사스러운 한 달이었다.

잠 오지 않는 밤 작업실로 내려와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공간. 일주일에 세 번 도자기 수업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차를 끓이고, 함께 이야기하고, 뭔가 딱딱한 수업보다는 그냥 함께 삶이 공유되며 자연스레 흐르는 시간이 있는 공간. 그런 공간에 머물며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때때로 공유되는 한 도예가의 집을 꿈꾸게 되었다.


40년 넘게 도자기를 하고 있는 그녀는 말했다.

“도예가 좋은 이유는 끝이 없고, 같은 순간이 한 번도 없다는 거야. 여전히 마지막까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측이 불가능하지. 그리고 그 결과엔 실패도 있고 새로운 발견도 있지. 그것이 너무 좋아. 우리가 사는 것과 비슷하잖아."


스페인 세비야의 전체 시간을 생각하면 요코와의 인연은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스페인 생활과 한국 생활의 오버랩을 꿈꾸게 한 인연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요코를 만나기 전까지는 도자기를 4년 넘게 공부하면서도 한국에 돌아가면 도자기로 무언가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 순간과 주어진 시간이 좋아서 지속했던 공부였고 삶이었다. 어찌 보면 참 대책이 없었다.
하지만 요코의 공간에서 보낸 몇 개월은 그 막연한 시간을 조금 현실적 상상으로 초대해 주었다.


김치를 좋아하는 요코를 위해 스페인을 떠나기 전 김치를 만들어 주고, 꼼꼼하게 레시피를 적어 주었다. 마드리드 한인 마켓에서 조미김도 잔뜩 주문해서 채워주었다. 요코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일본에 가 보는 것이 자신의 숙제로 남아 있다고 했는데 그 숙제를 할 마음이 먹어지면 같이 동행해 주겠다고 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는 일본은 너무 먼 나라인 듯싶다,


이제 여든이 넘은 그녀의 작업실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과 함께 일 년에 한 번 전시회를 하는 사진들을 보내준다. 선뜻 길에서 만난 벗을 그녀의 공간으로 초대해 주었듯이 나도 너무 늦지 않게 나의 정거장에 그녀를 초대하고 싶다.

그리고 차 한잔을 내려주며 이야기해야겠다.


‘당신의 공간이 나의 공간을 꿈꾸게 했어요. 완벽히 같지는 않지만 지금 나도 이곳에서 어느 공백의 시간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그 꿈을 시작하게 해 주어 감사합니다’



이전 10화나의 도자기 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