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공간과 사람의 이야기

by 로하

2010년. 스페인으로 간다고 했을 때 친구들의 반응은 "부럽다"였다. 하지만 정말 부러울까. 나 스스로도 적지 않은 나이에 삶의 터를 잠시 옮기는 결정에 문득문득 의심이 싹트고 확신이 없었는데 말이다.

“송별회 하자!” 길래 “무슨 송별회야. 아주 가는 것도 아닌데...” 하다가 그래도 이 기회에 여러 이유로 쉽게 모이지 못하는 친구들의 안부들을 물어보고도 싶었다. 삼삼오오 따로 만나 그냥 술 마시고 밥 먹고 수다 떠는 거 말고 좀 다르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나의 겉만 거창한 인생 2 시즌 이야기를 나눈다는 핑계로 친구들의 현재 이야기도 들어보면 좋을 듯했다.


모임을 하기로 마음먹고, 모임에서 함께 볼 영상 하나를 만들기로 했다. 20대 어느 시간에 꿈꾸던 다큐멘터리 감독의 꿈을 끄집어내어 퇴사 후 출국까지 좀 여유 있는 시간 동안 몇몇 친구들을 찾아 만났다. 모두 ‘그녀들’이었다. 카메라를 가운데 두고 나누는 대화는 다소 진지한 우리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그렇게 친구들의 삶이 말들로 모였다.

2010년 여름, 나와 친구들은 37살의 가운데, 37.5 정도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결혼한 친구들은 육아에 정신이 없고,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회사에서 중요한 시기를 건너고 있기도 했다. 그 시간 안에 조금은 익숙해진 것이 있었고, 잊어버린 것, 잃어버린 것도 있었으며, 또 여전히 남은 숙제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는 저마다 어느 철학서의 밑줄 못지않은 그녀들만의 한 문장들이 있었다.


모임의 이름이 ‘호랑이 쇼’가 된 것은 2010년이 우리 띠인 호랑이 해였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참여한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 호랑이 띠인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까지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 한 명 한 명 직접 초대를 했다. 나에게는 모두 ‘지인’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서로 낯설기도 한 사람들의 모임은 그 당시 그렇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우리끼리 보자’며 주춤했지만 모임 날 많은 친구들이 홍대의 한 공간으로 찾아와 주었다.


말하고 들으며 이야기가 쌓이고 누군가의 송별회가 아닌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우리들의 무대가 되어가는 시간이 조금은 벅찼다. 그렇게 호랑이쇼를 마치며 모두는 언젠가 내가 스페인에서 돌아오면 ‘호랑이쇼 2탄’을 하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떠났다.


돌아와 머물며 만든 나의 공간 ‘정거장’에서는 ‘니니 쇼’를 했다. ‘니니 nini’는 스페인어로 ni trabajar ni estudiar (일도 안 하고 공부도 안 하는) ‘백수’를 표현하는 말이다. 유난히 니니들이 많이 오고 가는 정거장이기에 농담처럼 같이 모여 수다 잔치를 벌이면 재미있겠다 하다가 정말 10년 전 ‘호랑이쇼’만큼이나 즉흥적으로 수다판이 벌어졌다. 20대에서 40대까지 다양한 이력과 삶의 자리를 가진 니니들이 모여 자기소개를 하는 데만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요즘 흔히 말하는 ‘라테는 말이야’라는 문장이 꼰대의 문장이 아닌 ‘나의 문장’으로 그래서 듣기 싫은 문장이 아닌 ‘공감의 문장’이 되는 시간이었다. 점점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미리 차단되곤 하는데 과거가 쌓이지 않은 ‘나’가 어디 있을까. ‘라테(나 때)’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누군가의 ‘라테’가 아닌 그로 인해 흥미로운 현재의 어떤 ‘나’를 만나는 시간이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날 나는 10년 전 호랑이쇼를 다시 만나는 듯했다. 그리고 10년 전 호랑이 쇼 때처럼 ‘니니 쇼’를 마치며 사람들은 모두 니니 쇼 2탄을 기대했다.


떠나면서도 머물면서도 이야기는 그렇게 어떤 교집합으로 이어졌다. 정거장이라는 나의 공간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간다. 도자기와 스페인어라는 크게는 두 개의 키워드를 가진 공간이지만 그 고리를 엮어 만들어지는 관계는 그 상으로 재미있고 신기하다.

물론 생각하는 것만큼 공간 판타지는 그럴싸하지 않다는 것을 대부분의 시간에서 알아가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만나지는 순간들은 흔치 않은 순간인 경우가 많기에 대부분의 답 없는 질문 같은 시간을 이어간다. 순간은 여운이 길지도, 그것이 무언가 새로운 시간으로 극적으로 이어지지도 않지만 그다음 순간을 기대하게 하는 작은 동기 정도를 항상 남긴다.


거기에 잠시 머문 누군가가 이런 한 문장을 남긴다면 그 기대감은 조금 더 상승한다.


“잘 멈추었다 갑니다.

(멈추었지만 조금 전진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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