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역

포토 에세이

by 시를아는아이

1992년 봄 나는 대학에 갓 입학해 서울 살던 어느 친척 아이의 과외를 하러 다닌 적 있었다. 친척집은 대림역 근처 아파트에 있었다.

특별한 기억은 없지만, 경상도 시골에서 자란 내게 초등학생 친척 아이는 너무 철 없는 응석받이로 보였고, 자그만 강아지 반려견과 노는 것도 낯설게만 보였다.

그날도 수업이 있었던지 난 학교 강의가 끝나는 대로 미리 대림역 근처 공원에 가서 자리를 잡고, 독서 과제로 책을 읽고 있었다. <교양 영어> 부교재 ‘The Reading Book’에 실린 한 단편 소설(‘Appointment with Love’)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수업 시간이 가까워오는데, 소설도 점점 결정적 장면을 향해 가는 것이었다.

전쟁에 참가했던 장교가 제대하고 마침내 그동안 펜팔로 사귀었던 여성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장면이었다. 약속대로 붉은 장미꽃을 옷깃에 꽂고 나온 여성의 외모에 마음속으로 실망하면서도 겉으로는 예의를 지켜 말을 걸려는 순간….

오랜 시간이 흘러 전철로 대림역 근처를 지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 책을 읽던 공원과 목련나무 아래 벤치를 눈으로 찾고는 한다. 하지만 늘 부정확한 기억처럼 정확한 좌표(?)를 찍는 데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이른 봄바람처럼 셀레던 그 책읽기의 기억은, 내 몸에 닿던 서늘한 벤치의 느낌과 함께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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