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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삼열 Oct 27. 2023

길 위의 7200시간


  얼마 전, 짧은 메모를 바탕으로 하여 한 편의 글을 완성해 보는 수업을 했다. 글의 제재는 ‘나의 등굣길’이었다. 초고 이전의 메모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메모 및 초고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같은 제재, 동일한 주제로 글을 써도 이렇게 다양한 결과물이 나오는구나, 흥미로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의 학창시절, 등하굣길을 떠올렸다. 

  “얘들아, 선생님은 왕복 세 시간 동안 학교를 오갔어. 상상이 되니?”

  “네에? 저 같으면 학교 안 다녔어요.”

  이런 반응이 나올지 알았다니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서정주 시인 식으로 표현하자면, 나를 키운 건 8할이 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등하굣길이었다.

  시간으로는 7200시간. 분으로는 432000분.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길 위에 있었다. 흐린 눈으로 횡단보도를 건넜고, 만원버스 안에서 휘청였으며, 직장인들 틈바구니에서 지하철을 탔고, 마지막으로 1.5km를 걸어 학교로 갔다. 왕복 3시간의 긴 여정. 나를 키운 건 8할이 등하굣길이었다. 이에 대해 말해 보려 한다.       


       


  나는 경기도 파주시의 작은 읍에 살았다. ‘봉일천’이라는 동네였다. 임진강을 옆에 끼고 있어서, 물난리가 자주 나는 동네였다.    

  물론 봉일천에도 학교는 있었지만, 나는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맹학교’라는 학교를 다녔다. 시각장애인을 전문으로 교육하는 국립 교육 기관이었다. 유치원 과정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모든 학제가 개설되어 있는 우리나라에 한 곳뿐인 시각장애인 국립 학교였다.

  서울맹학교, 다 좋은데... 멀어도 너무 멀었다. 봉일천 집에서 편도 1시간 30분, 왕복 3시간이 걸렸다. 나는 이 학교를 12년 다녔으므로(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등하교 시간만 7200시간 이상 걸린 셈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그 무렵에도 부모님은 지금처럼 식당을 운영하셨다. 식당 집 아들이었던 나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른바 아침 장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 몇 번 길을 익히기 위한 등하굣길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등하교를 혼자 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오갈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20분을 걸어서 학교를 가는 것은 그때 내게 있어서 너무도 당연한 삶의 루틴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으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등굣길의 풍경은 다음과 같았다. 12년을 하루같이 오간 길이지만, 특히 16살 청소년의 눈에 비친 길을 서술해 보고자 한다.       


  - 06시 55분. 

  중학생이던 나는 집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때만 해도 신호등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횡단보도만 선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이 많았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려면 4차선 도로를 건너야 했다. 지금보다 시력이 아주 조금 좋았으므로, 차가 오는지 눈으로 보고 건넜다,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소리에 의지해서 길을 건너다시피 했다. 하루 중 가장 진땀나는 순간이었다. 운이 없으면 차도 위에서 오가는 차들의 행렬 속에 갇히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장애인이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부딪혀야 할 장벽이 참 많은 듯하다.      


  - 07시 10분.

  서울까지 나가는 광역 버스에 탑승했다. 좌석 버스였는데, 승객이 너무 많아서 입석 버스나 다를 게 없었다. 앉아 가는 건 고사하고, 버스 앞문 쪽 계단에 위태롭게 발을 걸친 채 30여 분을 서 가기 일쑤였다. 

  그 버스를 생각할 때면, 9·11 테러가 생생히 떠오른다. 2000년 9월 11일, 중학교 3학년이던 나는 버스 안에서 테러 및 전쟁 소식을 처음 접했다. 손석희 앵커가 침중한 목소리로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승객 모두가 숨죽이고 뉴스를 들었다. 비행기 테러, 보복 공격, 미사일, 핵탄두, 시가전. 나는 머리털 나고 처음 접하는 전쟁 소식에 몹시 겁이 났고 전율을 느꼈다. 모골이 송연해지던 그 가을날을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우리는 전쟁 같은 출근길, 등굣길에 전쟁 소식을 들었다.          

             

  - 07시 50분.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 역사로 들어갔다. 서울의 시작점인 구파발역이었다.

  "무임승차권 한 장이요."        

  그때만 해도 종이로된 승차권을 발급받아 지하철을 탔다. 매표소 직원에게 장애인 복지카드를 보여주면 무임승차권을 발급해 주었다. 지하철을 타는 승객은 모두 발권해야 했으므로, 매표소 앞은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로 붐볐다.

  지하철을 대략 15분가량 탔다. 구파발역에서 타서 경복궁역에서 내렸다.  

  당시에는 지금보다는 시력이 조금 나았기 때문에 지하철에서는 프린트물에 눈을 가까이 대고 공부했다. 대개 영어 단어를 외웠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심정으로, 외우고 잊어버리고 다시 외우고 잊어버리고를 반복했던 것 같다. 그때 외웠던 영단어는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당시는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에 지하철에서 딱히 할 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승객들은 꾸벅꾸벅 졸거나, 책에 얼굴을 붙이다시피한 나를 힐끔대거나 했다. 나는 그런 시선을 따갑게 느끼며 단어장에 얼굴을 묻었다.      

  - 08시 05분.

  경복궁역에서 내려 역사 밖으로 나갔다. 청와대 쪽으로 20분 정도 걸어가면 서울맹학교가 나왔다. 물론 걷지 않고 버스를 탈 수도 있었지만, 차비가 아까워서 그냥 걸었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그때 십 수 년을 매일 걸었던 것이 다리 운동에 참 좋았던 것 같다. 그 덕분인지, 지금까지 다리 하나는 참 튼튼하다.      


  학교까지 가는 20분 동안 EBS에서 제작한 한국문학선집을 듣곤 했다. 왼쪽 귀로는 거리의 소리를 들으며, 오른쪽 귀로는 오디오북을 듣는 식이었다. 시력이 좋지 못했으므로 양쪽 귀 모두를 막고 걸을 수는 없었다.

  주로 수능에 나오는 한국문학을 감상했는데, 그중에서도 박태원과 이상의 문학을 즐겨들었다. 

  때로는 소설가 구보씨가 되어 종로 거리를 걸었고, 때로는 시인 이상이 되어 골목길을 거닐었다.     


  당시 나는 구보씨의 처지를 표현한 문장, ‘모두가 그의 갈 곳이었다. 그러나 한 군데도 그가 갈 곳은 없었다.’에 경도되어 있었다. 나는 길을 걸으며 진로와 인생에 대해 생각했고, 그 막막함에 숨이 가빠왔다.        

  자의식 과잉의 청소년기를 보내던 나는 이상의 시 ‘오감도’에서처럼 불안했고 초조했으며 예민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나의 내면이 이렇다 보니, 일제 강점하의 암울함을 담아낸 문학 작품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바야흐로 사춘기였고, 나는 호르몬이 용솟음치던 청소년이었다.                 



  한편, 효자분식을 지나면 서울맹학교가 바로 나왔다. 등교를 하는 시각에 효자분식은 벌써 영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 아침부터 누가 떡볶이며 라면을 먹으러 갈까? 그게 나일 수는 없을까? 떡볶이는 왜 하굣길에만 먹을 수 있을까? 군침 흘리며 매일 그 앞을 지나갔다. 

  그로부터 거의 20여 년이 지난 후, 효자분식이 드라마에 나왔다. 코끼리분식이란 이름으로. 나의 코 묻은 돈이 잔뜩 들어간 분식집. 어떻게 보면 나도 저 분식집에 지분이 조금은 있는 셈 아닐까. 아니겠지. 그렇지만 나의 최애 분식집이었던 곳이 드라마에 나오는 걸 보는 마음은... 버젓이 성장한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뿌듯했다.  

    

  - 08시 25분.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등교 시각은 08시 30분까지였다. 만약 등교를 늦게 하면, 고3 선배들로부터 토끼뜀 같은 벌을 받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12년 동안 학교에 늦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로 지각하는 사람은... 학교 코앞에 사는 학생들이었다. 효자동 근처에 사는 학생들, 이를테면 옥인동이나 누상동, 누하동에 사는 친구들이 자주 지각하곤 했다. 그리고... 지각러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기숙사생이었다. 기숙사에 살며 지각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나의 등교 루틴에 대해 학생들에게 얘기해봤자, 아이들은 하품만 한다. 하긴, 나도 안다. 이런 얘기 따위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걸. 하지만 단 한 명이라도, 먼 훗날 국어 시간에 들은 나의 등교 루틴을 기억해 주는 학생이 있지는 않을까. 그 무식할 정도로 한결 같았던 12년의 등하굣길은 어떻게 기억될까. 그건 모를 일이다.        

  길 위에서 보낸 7200여 시간 동안 내가 보아온 것들, 생각한 것들, 상상하고 그려낸 것들은 도대체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그리고 스스로 결론 내리곤 한다. 

  ‘동경’이었다. 나는 바쁘게 출퇴근하는 어른들을 버스며 지하철에서 볼 때마다, 빠른 걸음으로 등하교하는 교복 입은 또래 학생들을 볼 때마다, 그들을, 그들이 속한 세계를 동경해 왔다. 

  ‘나도 교복을 입고 싶다.’, ‘나도 매일같이 출퇴근하고 싶다.’, ‘지금은 사복 차림으로 특수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언젠가 더 큰 사회로 나아가고 싶다.’, 열망했다.

  그런 동시에, 나는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 뿌리내리고 살 자신이 없었다. 내가 과연 저들과 같은 대학 생활을, 혹은 별다를 것 없는 직장 생활을, 그리하여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늘 자문했고 항상 의심했으며 노상 반신반의했다. 

  마음속에서 의문이 커갈수록, 동경하는 마음은 양분을 먹은 듯 12년 동안 점점 더, 더욱 더 커져만 갔다. 

  나는 7200여 시간 동안 7200번 나의 미래를 의심했고, 432000번 미래를 동경했다.    

  이것이 내게 있어서의 7200여 시간, 432000여 분의 힘이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등하굣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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