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치 Apr 24. 2024

IN RAINBOWS : 다양한 시점으로 다양한 색채로

by Radiohead (2007)

 수업이 끝나면 으레 학교 앞 시장통 좌판으로 향했다. 특별한 약속을 하지 않아도 우리 과의 불특정 선배, 혹은 동기 몇몇이 그곳에 먼저 앉아 있었다. 나는 매일 거리낌 없이 그들 사이에 앉아 소주를 깠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무리의 음주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입에 들어가는 안주는 항상 떡볶이였고 주종은 언제나 소주 아니면 막걸리였지만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늘 달랐다. 어떤 날엔 연애 이야기를 하고 어떤 날엔 정치 이야기를 했다가 전날 했던 이야기들을 또 하고 또 하고….

 그날도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가수가 되어버린 친구 강백수와 몇몇 친구들이 모여서 음악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 라디오헤드 최고의 곡이 무엇일까? 묻자 ‘또?’라는 기시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일단 나는 <Paranoid Android>야 말로 다시없을 명곡이며, 그 곡이 수록된 <OK Computer>만이 명실상부 라디오헤드의 최고작이라 할만하다 말했다. 강백수는 좋아하는 라디오헤드의 노래로 <Just>와 <High and Dry>를 꼽았고, 이들이 수록된 <The Bends>를 높이 평가했다. 또 다른 친구(였나 선배였나)는 ' <Kid A>가 가장 뛰어난 앨범이다,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를 들어보기나 했냐?'라고 핏대를 세웠다. 우리는 한참 동안 라디오헤드를 안주로 삼아 쩐내 나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비록 좋아하는 음반들은 달랐지만, 우리는 ‘라디오헤드의 음악이야 말로 록과 팝의 최첨단'이라는 한 가지 명제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밴드가 얼터널티브 록의 전형을 세운 1집 <Pablo Honey>과 <Creep>의 그늘을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얻어낸 칭호였다. 남들은 단 한곡을 히트시키지 못해 사라져 가는 와중에, 라디오헤드는 자신들의 메가 히트곡을 무슨 망령 취급하는 비범함을 보였다. <Creep>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에 <The Bends>가 태어났고, 거기서 한 단계 더 도약하여 <OK Computer>를 이루어냈다. 이 두 앨범을 통해 라디오헤드는 기어이 <Creep>의 이름을 어느 정도 지워내는 데 성공하고야 만다.

 4집인 <Kid A>부터 밴드는 일렉트로닉 음악으로의 외도를 시도한다. 그런데 이 외도가 또 성공적인 나머지, 라디오헤드는 다음 앨범 <Amnesiac>까지 아예 저쪽 살림을 차려버린다. 2001년 즈음 처음 <Kid A>와 <Amnesiac>을 들었을 때의 기억이 선하다. 톰 요크가 ‘우리가 이렇게 해도 들을 거야?’라며 우울하게 흐느적거렸다. 그래도 음반은 잘 팔렸고 사람들은 라디오헤드에 열광했다. 그 정도의 충격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그 음악들 안에 분명 내가 알던 라디오헤드가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Knives Out> 같은 곡들에서 ‘밴드’로서의 모습이 살짝살짝 드러나긴 했지만, 어쨌든 <OK Computer>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음악에서도 라디오헤드가 들렸다. 그 어떤 낯선 재료나 레시피로도 스스로가 스스로일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 낸 것이다. 무슨 붓을 쓰든, 무슨 물감을 쓰든, 우리는 우리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2003년에 발매된 6집 <Hail to the Thief> 음반을 사고선, 선물로 받은 브로마이드를 한 면에 붙여두었다. 앨범 프론트 커버를 크게 확대한 그 브로마이드를 처음 봤을 때 ‘알록달록한데 칙칙하다' 생각했다. 앨범 수록곡들을 처음 들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다. 알록달록한데 칙칙했다. 그래, 이 앨범은 1~3집의 알록달록과 4집, 5집의 칙칙함의 악수였구나. 그 악수는 동시에 묘수이기도 했다. 무슨 짓을 해도 ‘나’ 일 수 있는 밴드인 라디오헤드가 단행한 세계관 대통합이었다. 나는 그 결과물인 <Hail to the Thief> 퍽 즐겨 들었다.


 군대에 있던 2007년. 휴가를 나왔다가 라디오헤드의 신보 소식을 들었다. 라디오헤드가 신보 <In Rainbows> 인터넷을 통해 배포하며, 소비자가 원하는 가격을 쓰고 다운 받되 공짜(!)로도 다운로드할 수 있다는 뉴스였다. 하다 하다 이제 유통까지 파격적으로 하는구나.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은 구해 들었다.

 포문을 여는 <15 Step>에서 잠시간 <Kid A>가 들리더니, <Nude>에서는 어째 3집의 울림이 느꼈다. 알고 보니 그 곡은 정말로 <OK Computer> 시절에 만들어진 곡이었다. <Weird Fishes/Arpeggi>, <Reckoner> 같은 곡들은 High and Dry가 아닌 High 하고 Wet 한 기분 좋은 격앙을 일으켰다. 휘몰아치는 <Bodysnatchers>와 <Jigsaw Falling Into Place>에서는 그들이 여전히 달릴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In Rainbows>가 라디오헤드 음악의 장르적 베스트 앨범이라 홀로 정의했다. 대통합 앨범이었던 전작 <Hail to the Theif>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상위 호환이었다. <Creep>으로부터 떠나와 긴 세월을 지나 보낸 그들의 면면이 피카소의 그림처럼 다양한 시점으로, 무지개의 다양한 색채로 아로 새겨져 있었다. 압도적이었다.

 때로 <In Rainbows>의 모든 곡들이 쉽게 쉽게 만들어졌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한다. 앨범 제작 중에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그저 이 앨범이 쉽게 만들어진 앨범이었다면 정말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마치 무협소설의 주인공이 무딘 검으로 힘을 들이지 않고 파도를 베듯이, 라디오헤드가 그런 느낌으로 <In Rainbows>를 빚어냈으리라 추측하는 일이 즐겁다.


 안타깝게도 2024년의 내게 있어 라디오헤드와 톰 요크의 음악은 더 이상 ‘최첨단의 음악’으로 들리지 않는다. 다소 강박적이기까지 한 변화추구가 역으로 피로함이 되었달까? <In Rainbows> 이후 라디오헤드의 음반들은 수작일지언정 역작이나 명작의 자리에 올리기는 다소 애매한 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전형적으로 혁신적인’ 절묘한 균형의 <In Rainbows>가 빛나는 앨범으로 남아있지 않나 생각도 해본다.

 음반을 반복해 듣다 보니 자연스레 2005년 여름의 바로 그 술자리가 떠오른다. 학우들과 시장통에서 라디오헤드 최고의 앨범을 논했던 바로 그때말이다. 지금 우리가 다시 모인다면 지난날보다는 훨씬 평화롭게 라디오헤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Release Date  October 10, 2007

Duration  42:43

Recording Location Halswell House, Somerset / Tottenham House, Wiltshire / The Hospital Club, London / Radiohead's studio, Oxfordshire


===

  

    파격적인 유통방식으로 발매했음에도, <In Rainbows>로 라디오헤드가 얻은 수익은 전작 <Hail to the Thief>를 뛰어넘었다.  

    앨범이 녹음된 장소들이 비범한데, 오래된 저택인 토트넘 하우스, 하스웰 하우스 같은 곳들이 눈에 띈다. 특히  토트넘 하우스는 녹음 당시 건물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밴드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Bodysnatchers>와 <Jigsaw Falling Into Place>를 녹음했다 전한다.  

이전 01화 S&M : 생애 첫 음반 구입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