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걷는여자 Dec 15. 2020

'어른'이 되는 어려운 길

삶은 엄마로 나를 단련시켰고, 이제 더 큰 일을 맡기려 한다

아빠를 보고 돌아온 날. 밤새 잠을 설쳤다. 자다 목이 말라 깼고, 잠깐 잠이 들었다가 몸이 불편해서 깼고, 기침이 나 잠이 깼다. 좁은 침대에 누워, 코에는 튜브를 끼고, 목이 말라 나오지 않는 침을 간신히 삼키며, 온몸이 묶인 것은 아빠의 육체이기도 했지만 나의 마음이기도 했다. 내가 아빠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좁은 침대에 묶여있지만 영혼은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뒤척이느라 시간마다 시계를 봤던 밤이 지나고 아이의 얼굴이 서서히 선명하게 보였다. 새벽이 시작되었다. 이불에서 일어나 바닥을 딛는 발바닥에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느낌이 전해졌다. 빨래, 설거지, 아이의 물통, 마스크 세탁 등 전날 몇 시간 나의 공백을 해치운다.

아빠를 만나고 나온 병원 앞엔 노란카페트가 깔려있었다.

어른이 되면서 마주한 첫 번째 어려움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결혼 전에는 대부분 나의'호불호'에 의해 이런 선택이 가능했지만 결혼 이후에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선택의 어려움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은 아이가 감기에 걸려 열이 났을 때였다. 소아과에서 처방받은 항생제를 아이에게 먹일 것인지, 스스로 회복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이것은 정~~~~ 말 어려운 고민이었다. 열이나 힘들어하는 아이를 간호하며 밤새 이마에 수건을 적셔 닦아주며 괜한 고생을 시키는 것은 아닌지 큰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아이의 감기는 지나갔고 그런 고민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이를 어디서 출산할 것인지

아이를 언제 어떤 어린이집, 유치원에 보낼 것인지

아이를 어떤 초등학교에 보낼 것인지, 무엇을 배우게 할 것인지

집을 매매할 것인지, 전세, 연세를 살 것인지

이사를 할 것인지 그냥 살 것인지

대출을 20년 할 것인지, 30년 할 것인지

이율을 고정으로 할 것인지, 변동으로 할 것인지

바이올린을 가르칠 것인지, 피아노를 가르칠 것인지


나의 선택으로 아이의 일 년이나 평생이 좌우된다는 중압감에 올바른 선택을 위한 치열한 정보검색과, 고민, 기도가 머릿속에서 늘 떠나질 않았다.


그게 다인 줄 알았다. 

아이의 인생을 좌우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선택하는 기준도 어느 정도 생겼고, 차근차근 안정적인 가정을 만들어나가는 나만의 리듬도 생겼다. 

그런데 나는 지금 전혀 생소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아빠를 그 병원에 그대로 입원하게 놔둘 것인지, 병원에서 하는 모든 처치와 치료 방법에 따를 것인지

병원의 처치가 최선인 것인지, 다른 병원을 알아봐야 하는지

씹고 삼키는 것이 어렵고 폐렴이 자꾸 재발하는 아빠에게 콧줄을 허락할 것인지, 주사제로 영양을 공급하는 게 나을지


엄마 노릇도, 여자 노릇도 간신히 해내고 있는데 '딸자식'노릇을 해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 선택을 함에 있어 성공확률이 높은 것은 '내가 그 사람이라면' 무엇이 더 좋을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아빠를 위한 선택을 했는데 바로 아빠를 제주로 모시고 올 계획을 세웠다. 나는 외동딸이고, 면회를 할 수 있는 건 엄마와 나뿐이었다. 온전히 아빠를 위한 선택을 하기로 했는데 아빠가 만나고 싶은 것은 나였고, 유일한 손주, 손녀인 아이들일 것이다. 내가 아이들과 이사를 갈 수 없으니 아빠를 오시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각만으로 끝내기엔 아빠에게 남은 시간이 짧다. 네이버에서 '요양원'과 '요양병원'으로 검색하여 주변에 대략 6군데의 시설을 차장 전화를 건다. 전화해서 뭘 물어봐야 하는 건지 잠시 망설여졌지만 과감하게 전화를 걸었다. 


삶은 엄마로 나를 단련시켰고, 이제 더 '큰 일'들을 맡기려고 한다.



작가의 이전글 용기 없는 여자의 결심; 용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